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근 Dec 30. 2021

칙칙폭폭 이별 뉴스레터 - 1

2021년 여름 일기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남자친구와 이별하고 또 한국행을 결심했던 이번 여름, 친구 새이와 나눈 교환일기 시리즈입니다.

두서없고 개인적인 이별 뉴스레터 시작합니다!







1. 절전모드의 유익 ⚡️


오늘따라 유난히 힘이 없다. 내가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2주간 일상을 군말없이 지켜나갔다. 역설적이게도 애도의 자격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하릴없이 시간을 흘려 보내는 게 아까워졌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적은 수없이 많으나 그건 ‘이러다 살찌지’ ‘나중에 후회할텐데’ 따위의 껍데기밖에 안 남은 타령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느낀 아까움은 쉽게 묵살할 수 없는 종류로, 제 3자가 나를 보며 하는 말이 어쩌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듯 낯설었다. 나는 낯가리는 마음으로 성실히 방 대청소를 하고, 한국에 갈 짐, 버릴 짐, 기부할 짐을 구분해 놓고, 끝내주는 가계부를 만들고, 연애 유튜브를 열심히 들었다 (음?). 


최근 몇년간 자책과 실망으로 지지고 버무리고 볶았던 ‘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세 가지 일을 지난 2주간 어느때보다 훌륭하게 지켜냈다 (기도, 운동, 그림). 그러면서도 하고싶은 건 다 했다. 슬퍼지면 울고, 깨어있는 게 재미없으면 어느때건 잤고,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멍한 채로 있었다. 그 상태로 일상을 수행했고, 효과(은)는 엄청났다! 듬성듬성했던 달력에 세 가지 색의 동그라미를 빽빽이 채우며 나는 위로를 얻었다. 분명 짐 같았던 세 가지 일상이 ‘할 수 있어서 감사한 일’, 특권으로 느껴졌다.


지금 보니 중요한 일만 하자는 무의식적인 선택은 생각을 덜어내는 방어기제였다. 이미 짜여진 일을 수행하는 중에는 스스로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된다. 할까말까 따위를 고민하며 잠자는 뇌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잘하려고 신신당부나 후평가를 안 하니 긴장도 없었다. 세 시간어치 일을 하면 동그라미 세 개를 그릴 수 있게 되는데, 그것만 해도 잘 산 하루였다. 위기의 순간에 나를 지탱하는 건 일상이었다-는 공익 문구같은 말을 나도 경험할 수 있어 아주 뿌듯한걸. 


딱 전남친과 마지막 인사를 하기 전까지 그랬다. 깨어난 생각은 잘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나로 돌아오니 일상을 지켰던 덤덤함과 헐렁했던 기대치를 잃었다. 세 가지 일을 안 해도 될 구실이 자연스레 찾아졌다. 단순했던 절전모드의 내가 그립다.







2. 빼고 덜어서 나온 건... ?


한국살이를 준비하다 마음에 드는 가구를 발견했다. 유닛 품목을 조합해서 높은 책장, 낮은 책상, 테이블, 티비장 등 다양한 형태의 가구를 만들 수 있는 상품이었다. 기분에 따라 방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분리가 가능하니 이사 다닐때도 운반이 비교적 쉽고 원목이라 소재의 느낌도 그대로다. 공사장에서 튀어나온듯한 단순하고 투박한 형태가 특히 좋았다. ‘어 뭐야, 너무 이상해.’ 이쯤되면 엄마의 탈을 쓴 초자아가 태클을 건다. 엄마는 마감처리가 완벽한 기성품을 선호해서 자기 용도에 맞는 세세한 기능을 갖춘 물건을 찾아다니는 쪽이다. 까다로운 기준에 온전히 부합하는 물건이 잘 없기 때문에 여러 종류를 마련해 놓고 용도에 맞게 돌려 쓰는 시스템이다.


나는 빼고 덜어낸 본질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차분하고 행복하다. 물건이란 세심한 기능이 추가될수록 유연성이 떨어져 한 두 가지 목적에 얽매이기 쉽다. 내가 몸을 좀 더 움직일지언정 물건 하나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해서 다른 물건을 또 마련하지 않아도 될 때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최소한의 가구만 갖춘 텅 빈 느낌의 방을 꿈꾼다. 내 마음에는 갖가지 욕심이 (게으름 90%) 혼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덜고 빼는 과정이 주는 편안함은 나에게 의미깊다.


어떤 대학생이 아이패드 기본 앱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유튜브 비디오를 보고 감탄을 했다. 무료로 제공되는 기본 앱은 기능이 잘 갖추어져 있어 응용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며 엄청난 꿀팁을 선보였다. 그러나 기본 앱은 직관적이지 않다. 기본 개념을 익히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이고 싶지않은 사람들은 직관적이고 친절한, 시스템이 짜여진 유료앱을 선호한다. 진입 장벽이 낮은만큼 아쉬운 점을 발견해도 개발자가 아닌 이상 고칠 수 없다. 결국 다른 앱을 또 찾아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기 십상이다.


앞서 말한 대학생의 다른 비디오를 살펴보니 활용을 즐기는 성향이 확고했다. 엑셀의 무료앱 버젼인 넘버스에 단어장을 만들고, 노션에 학점과 점수 관리 자동화 시스템을 이미 구축해 놓았다. 나는 자극을 받아 지난 주 내내 성과 열을 다해 구글시트 가계부를 만들었다. 아름답고 소중해...


오늘의 집 플랫폼에서 아파트에 살다 전원주택으로 이사간 사연을 읽었다. 작성자는 아이가 장난감은 금방 질려하는 반면 돌이나 풀 같은 것들은 매일 가지고 놀아도 잘 논다며 자연 가까이에 살게되어 다행이랬다. 


개인주의, 큐레이션, 구독 서비스, 커스터마이징... 스스로 하지 않아도 이미 구축된 것들이 참 많다. 그것을 찾으러 바쁘게 다닐 것인지, 직접 만들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며 많이 주어진 게 좋지만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기능을 갖춘 장난감이 금방 질리는 이유는 내가 끼어들 틈이 없어서, 자신을 투영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 때문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지만 멀리 보면 다른 선택과 집중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자존감은 스스로를 인정하는 힘이라고 하는데, 스스로를 아는 힘도 된다는 걸 요즘 느낀다. 나는 자존감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으레 30대가 되니 상승추세다. 그러면서 내 취향도 점점 드러나고 있다. 내 맛대로 산 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나는 절대 내 취향과 닮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내 취향은 아직까지는 자기표현이 아닌 지향점, 방향성에 가깝다.


나는 프랙탈 원리를 믿는다. 삶의 작은 부분은 인생의 큰 그림을 닮아 있기 때문에 작은 습관이 인생의 방향을 보여주기도 하고 결정하기도 한다. 가구든 앱이든 투박한 기본 기능을 활용하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이 취향이 내 인간 관계에서도 보이지 않을까, 또는 그런 방식을 적용하는 게 나에게 맞지 않을까 궁금해진다. 그럼 난 투박하지만 진솔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인데, 내가 새이를 좋아하는 걸 보면 언니는 투박하지만 진솔한 사람이라는 논리가 된다. 그러고 보면 맞는것 같기도 하다. 투박하지만 진솔한 걸 다른말로 하면 귀여움 아닌가... 아. 나 귀여운거 좋아하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