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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Aug 16. 2023

아 왜그렇게 막살아?!?!

《비밀의 언덕,(2023)》, 이지은

https://youtu.be/NnwgJBIGzbc 


한 달에 한 번씩 영화 리뷰를 하겠다는 새해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마지막 리뷰를 쓴 지 몇 달이 지났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영화는 열심히 보고 있었다. 글을 쓰는 것만 미루어 왔을 뿐.  



<비밀의 언덕>의 주인공은 수도권의 가상 도시 '성원시'에 사는 5학년 소녀 명은이다. 엄마는 시장에서 젓갈가게를 하고, 아빠는 마땅한 직업 없이 엄마가 하는 젓갈가게를 거드는 둥 마는 둥 하는 한량인듯하고, 6학년인 연년생 오빠가 있다. 그리고 엄마의 의붓아버지와 의붓동생인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있다. 그는 학교에서는 공부도 곧잘 하고 교우관계도 좋고 글쓰기 대회에 나가서 곧잘 우수상도 받아 오는 모범생이다.



어느 날 명은이는 반장선거에 출마해서 학급반장이 되는데, 엄마 가게로 달려가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엄마는 '그런 건 왜 해? 반장보다 반장 엄마가 더 바쁜 거 몰라? 어서 가서 무른다고 해.'라고 말한다. 입 안에 음식이 가득 들어있는 채로 '우리 집 가훈은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라며 열변을 토하는 엄마는 우리 먹고살기도 바쁘다며 불우이웃 돕기 ARS에도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한다. 엄마가 다른 사람을 돕지 않는 사람인 것이, 환경오염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인 것이, 예쁜 옷을 입고 학교에 와서 커튼을 달아주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같은 반 경수네 우아한 엄마와 다른 것이 명은이는 속상하다.


"아 왜그렇게 막살아?!?!"


아빠가 딱히 직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이, 다른 아빠들처럼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평범한 회사원이 아닌 것이 창피하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담임선생님과의 가정환경조사에서 얼결에 '아빠는 종이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 엄마는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라는 거짓말까지 하게 되고, 거짓말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가짜 가족사진을 만들기까지 한다.



쌍둥이 자매 혜진과 하얀이 전학 오면서 명은이의 열두 살 인생에 하나의 파동이 생긴다. 알고 보니 둘은 자매가 아니라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는 사장과 그 업소에서 일하던 '아가씨'의 딸이었고 사장인 하얀의 엄마가 혜진을 거두어 같이 키우고 있는 것이었는데, 둘은 그런 적나라한 개인사를 소재로 글을 써 최우수상을 받는다. 여러 학교를 전학 다니며 그런 솔직함을 어른들이 좋아한다는 것도 아주 잘 안다. 명은이는 글쓰기 대회 준비를 위해서 사전도 펴 놓고 책도 여러 권 쌓아 두고 읽으면서 공부를 하는데, 자매는 '글쓰기 대회 준비? 한 시간 정도?'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가족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가족은 물음표예요.

가정의 달을 맞아 시에서 주최하는 글쓰기 공모전이 열리고, 명은이는 가족에 대한 글 두 편을 접수한다. 예전부터 써오던 그런 방식의 모범적이고 무난한 글 한 편과,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쓴 가족에 대한 정말로 적나라하고 솔직한 글 한편이다. 후자의 글이 대상, 전자의 글이 입선을 받게 되는데 수상작은 모두 지역신문에 게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명은의 갈등은 커져간다.



명은이처럼 학창 시절에 글솜씨는 나에게도 은은한 자부심이었다. 초등학교 때 교내에서 이것저것 글짓기 상을 탔고, 중학교 때에는 광역지자체에서 백일장 장원을 했으며, 고등학교 때에는 학보 편집장을 했고 독후감으로 상을 받아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앞에 나서고 튀는 건 꺼리면서도 개성 없이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 취급은 싫었다. 조용한 관종에게 읽고 쓰는 재주의 두각은 거의 유일한 출구였고, 게다가 그건 돈이 적게 들면서도 품위 있는 취미였다.


굉장히 오래전의 일이지만 명은이처럼 작은 인간이었던 내 인생에도 이것저것 숨기고 싶은 것이 많았다. 부끄러운 것과 멋진 것이 어떻게 다른 지도 알았다. 그래서 조그만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애썼지만 숨기고 싶은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을 때의 수치심도 생생히 기억한다. 인구가 적은 소읍에서는 건너 건너 다 아는 사이라 이 집 저 집의 사정을 쉽게 알 수 있고, 아주 사적인 소문도 쉽게 돈다. 소읍의 끈적하고 질척한 오지랖과 참견, 뒷소문이 싫었다. 대도시로 처음 왔을 때 갖게 된 익명성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누구네 집 딸도, 조카도, 손주도, 형제자매도 아닌 나.



환경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분리수거를 안 하고 쓰레기를 섞어 버리는 엄마에게 "아 왜 그렇게 막살아?!"라고 일갈하는 명은이의 한 마디에는 그냥 우리 집이 단순히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속상함이 아니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는 게 가훈인 집안의 아비투스가 너무나 싫은 마음이 담겨 있다. 명은이는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고,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고 싶고, 품위 있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인데. 그렇다고 그런 가족을 한심해하고 약간 경멸하는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가족이 알고 상처받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아 결국 대상을 받은 원고지를 회수해 와 '비밀의 언덕'에 묻어버린다.



명은이는 솔직한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인정하고 승인했지만, '명은이는 가족을 정말 사랑하는구나.'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선뜻 그렇다고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고, 아마 그런 마음을 가지는 자기 마음 때문에 받은 상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글은 그가 자라서도 마음속 비밀의 언덕에, 나를 그런 '나쁜 아이'로 만든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해서 남은 자국이 될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참 복잡다단한 측면이 있다. 독재자인데 자식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부모일 수 있고, 뜨거운 인류애를 가진 혁명가인데 바람둥이일 수도 있으며, 낯선 타인에게는 쉽게 호의를 베푸는 좋은 사람이면서 가족 구성원으로서는 최악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을 자기 자신과는 분리해서 각각의 인간 존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소녀의 어느 계절. 사려 깊고 아름다운 성장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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