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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Apr 22. 2018

낭만주의의 종말

북리뷰 ‘넛셸’ -이언 매큐언


'나'는 자궁 안에 여유도 없이 웅크려 따뜻한 양수 안을 헤엄치던 어린 시절을 종종 추억한다.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며 '나'는 어머니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은 없다. 가끔 어머니와 함께 와인을 나눠 마시며 취하고 팟캐스트로 세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어머니는 지루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그가 죽음의 벽을 지날 때마다 '나'의 무른 두개골을 뚫어 그의 열등한 유전자를 '나'의 뇌에 살포할까 걱정한다. 어머니는 아둔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그 남자와 아버지의 살해를 모의 중이다. '나'는 늘 존재(to be)와 그 사이를 떠도는 바깥세상의 온갖 것들을 상상하는데 시간을 보내며, 딱 한 번 탯줄을 목에 감긴 했지만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잊어본 날이 없다.



아아,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나 자신을 무한한 왕국의 왕으로 여길 수 있네.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셰익스피어, [햄릿]


넛셸. 뇌를 닮은 호두껍질 속. 이야기는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있다.'는 태아의 사색으로 시작해 사색으로 끝난다. 구석구석 삶의 아포리즘이 가득이다. 하지만 껍질 속 '나'의 왕국에서는 사색만 가능하다. '내'가 반드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다. 사색의 왕국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 모든 것들을 경험하는 것.


'나'는 부르주아적 삶을 꿈꾸고 빈민이 되는 것을 걱정했지만 결국 악몽이라 여겼던 감옥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양막을 제 손으로 찢어 경험할 수 있는 [삶]으로 몸을 던진다. 작가는 삶에 대한 태아의 열망을 풀이하며 그것이 나에게도 본능이었음을 상기시키고 다시 돌아와 질문한다. 너는 '살아있는-태어나 있는' 거냐고.


불현듯 살펴보니 양 손에 호두가 한가득이다. 지레 걱정하고 겁을 먹는다. 태어나지 못한 생각들이 [삶] 앞에 누워 으름장을 놓는다. 달아나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손 마저 내밀 수도 없어 도무지 어쩌자는 건지 알 수 없는 사색의 왕국에서 퉁퉁하게 살 오른 절대 왕 노릇이나 하고 있다. 옛날 옛적, 자신을 태양이라 여기던 왕의 웃을 수 없는 일화들과 그의 죽음에 울리던 환호를 떠올린다. 생각에 갇혔을 때 은근하게 다가와 얼굴을 핥는 독선과 고요한 종말의 풍경을 환기한다.


한밤중의 양치기에서 은퇴하고 장난감 가게에 이력서를 넣을까 싶다. 여름밤이 문제인지 양이 문제인지 내가 문제인지 여하간 몰아넣기에 종일도 부족한 지경이다. 당분간 호두까기 인형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힘 조절은 필수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 상태에 괴로워한다ㅡ그것이 의식이라는 선물이 주는 고난이다. p.45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한계요 진실은 이것이다ㅡ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때, 거기가 아니다. p.54
신은 말씀 하셨다. 고통이 있으라. 그리고 거기 시가 있었다. 결국. p.68
울어야 할 사람은 나다. 하지만 태어나지 않은 아이란 근엄한 스토아 주의자요 물속에 잠긴 부처이며, 표정이 없다. p.70
사랑이 식고 결혼이 무너지면, 그 첫 희생자는 정직한 기억이지. 과거에 대한 온당하고 공정한 회상. 그건 너무 불편하고, 현재를 지나치게 비난하니까. p.96
권태는 희열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고 인간은 기쁨의 해안에서 권태를 바라본다. p.104
죽은 자는 아무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다. p.135
하지만 나조차 안다. 사랑이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권력이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연인들은 갈망뿐 아니라 상처를 안고도 첫 키스에 이른다. p.166
삶의 얼마나 많은 것이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잊히는지 나는 이미 잘 안다. 대부분이 그렇다. 현재는 주목받지 못한 채 실감개의 실처럼 우리에게서 풀려나간다. 특별할 것 없는 생각들이 헝클어져 수북이 쌓이고, 존재의 기적은 오래도록 방치된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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