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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현 Jul 03. 2018

우리는 자유에 처단되었다

실존

주변의 것들이 명료해지는 듯한 순간들을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맹목은 세계가 ‘점’ 일 때는 절대 오지 않는다. 점은 점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그것은 정말로 점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맹목은 그 점들이 결속되어 하나의 형상(=은유)이 될 때 도래한다.


형상이 되는 순간 세계는 형상에 한정된다. 니체는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라고 정의하고, 하나의 덩어리로 사유될 수 있는 것은 허구라고 말한다. 고정된 은유(구체어)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는 즉자 존재뿐이다. 언어는 약속이며 한계이다. 사유는 언어에 귀속된다. 모든 메타포는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사유의 운동성을 전제할 때, 하나의 표현 규격에서 벗어나 생동이 될 수 있다. 고정된 것에게서는 오래된 무엇의 냄새가 난다. 자아상과 그 앞에 늘어진 단 하나의 정체성이 지루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식은 나에게서 출발한다. 하나의 숲에서 멀어져 하나의 산, 하나의 대륙, 하나의 별, 그리고 우주. 세계는 흘러가는 순간, 즉 과거마다의 해석이며 해석은 ‘의지’의 결과값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는 기준을 모조리 외부로 돌리는 책임회피와 다름없다. 나의 세계는 언제나 나의 선택에 따라 표정을 바꿔왔다.


하지만 그 너머에 목적이라는 라벨을 달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순간의 다음 또 그다음만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이 무의미로의 회귀가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비극의 지혜’라는데 있다. 바로 직전까지의 기획과 결과물(현재의 나)을 지양하고 미래(앞으로의 나)를 응시할 때 발생하는 공허의 틈새에서 '이다음은?'이라고 물을 때, 새로운 기획의 수많은 선택지가 열린다. 지금까지의 기획은 그 전의 기획들처럼 무로 돌아간다. 이것이 무화다. 앞으로의 나를 향해 현재의 나를 무화한다. 무화는 기투하는 실존자의 특권이다. ‘인간은 무화 안에서 기투할 때만 실존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무화는 나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생각, 활동이 하나의 먼지, 하나의 점이라는 팩트(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를 투척한다. 때문에 이와 동시에 우주만 한 크기의 가능성도 함께 펼쳐진다. 무화는 필연적으로 자유를 동반한다. 인간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선택하지 않겠다는 것 마저 선택이다. ‘우리는 자유에 처단되었다.’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다. 이 광활한 선택의 자유가 불안과 두려움을 호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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