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현 Aug 06. 2018

오해의 예언

당신과 나는 어쩌다 교차하고 자주 엇나간다

나와 네가 당사자인 상황이 벌어진다. ‘ 상황을 해석한다. ‘ 상황을 해석한다. 상황을 바라보던 삼자가 상황을 해석한다. 서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황을 두고 생산되는 해석은 상황에 대한 정보가 있는 모두의 수만큼 생산된다. 이렇게 생성된 ‘자기 해석 늦건 빠르건 기어이 표출되거나,  나아가 언젠가 ‘가장 적확한 형태로 표현해야만 하는 달성 과제까지도   있는 개인의 경험적 서사로 치환된다. 개인의 해석이 납득할 만한 서사를 갖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독창적이거나 미적인 가치를 지닐 , 우리는 이것을 ‘예술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해석은 각자가 가진 정보의 조합과 각자가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의 한계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더라도 조합의 수가 무한대에 가깝다는 것을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상황이 벌어졌을  ‘올바른 해석이란 비어있는 말이다. 언제나 ‘나의 해석이며 ‘나에게만 올바른 해석이다. ‘ 언제나  밑에 흩어져 있다. 당신과 나는 어쩌다 교차하고 자주 엇나간다. 당사자를 필두에  결과론적 정답은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반쪽이거나 파편이다. 나의 정답은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오답이거나 정확한 오답이  운명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벽한 이해따위는 절대로 불가능할 소통을 포기해야 할까. 이것으로 대부분의 정념이 비롯되는 ‘오해 막을  있을까. 세상과의 완벽한 단절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타자를 향한 완벽한 포기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일만큼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계가 단 한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나’의 대자인 ‘너’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는 나를 ‘나’라고 칭할 수 있는 조건이 사라진다. 타자의 불가해성을 인식하고 난 후에야 이루어지는 나-되기는, 나-되기가 달성되든 달성되지 않든 자기 인식으로 향하는 출발점이 된다. 인간인 이상은 여하간, 내부의 무엇인가를 외부로 꺼내지 않고서는 자기-존재(to be)를 인식할 길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영화 'Song to Song'


그러나 거리의 모든 사람을 타자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들은 타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타자라는 인식은 나로 하여금 그에게 성격을 부여하는 순간부터 이루어진다. 경험적 서사의 교환은 ‘타자인지’를 위한 필수 요건이다. 오해를 거듭하면서도 성급한 단정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선택한) 당신이라는 지옥(사르트르-닫힌 방)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당신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되는 소통 안에서 ‘나-되기’라는 생의 근원적인 착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의 동의어는 ‘한계’이며, 우리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간에 있었던 적이 없다.


나는 지금, 하나의 인간이 도출한 결과로써의 오늘보다 그가 가진 서사와 공명하는 휴머니즘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결국 이기적이라는 쓸쓸하고도 뻔한 눙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불가피하게 이곳에 태어나 끝내 사유하게 되고 마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당신과 나와 우리 사이에서 맴도는 유구하고도 지겨운 과제를 똑바로 마주 보고 싶다는 뭐 그런 얘기다. 포기는 가끔 내려놓음의 미덕으로 윤색되기도 한다. 모두가 다른 이 ‘내려놓음’의 지점을 누군가는 한계점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이곳에서 ‘나’로 소급되는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해하려는 일’에 있어서는 가끔 포기하고 거의 모든 순간 내려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시절의 나는 의무에 머리채를 내어주고는 황폐해졌고, 어느 시절의 나는 마른 사막이 두려워 뒤돌아 줄행랑을 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의 나는 물이 되어 기적처럼 당신의 문 앞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어떤 길이든 벌어질 일은 벌어졌고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도 벌어졌다. 사막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거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했다. 살아있는 한 무슨 일이든 벌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적어도 내가 선택한 사막에서 헤매고 싶다고 생각한다. 온전한 한 사람 분의 삶이란 ‘마주 보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너를 이해하고 싶다”는 말은 “너를 기필코 오해하고야 말겠다”는 예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이해하고 싶다”는 문장을 반복한다. 그 문장은 당신에게 건너가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 나의 결여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며, 살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안한 다짐이자,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존재의 카르마이기 때문이다.
-
what are you?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자유에 처단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