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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필닥 Field Doctor Oct 19. 2023

떠돌이의사는 왜, 어떻게 의대에 갔는가 (1)

안녕하세요. 

떠돌이 의사 노마드 닥터입니다.


오늘은 제가 왜, 어떻게 의사가 되었는지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그러려면 제 유년시절부터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 해보아야겠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전라도 완도출신, 어머니는 전라도 광주출신인데 광주에서 태어나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광주로 찍혀서 차별당하며 살 것 같다며 서울에서 낳으셨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1-2년 살다가 전라도 해남으로 갔다가 해남에서 광주로 가서 광주에서 초중고를 다 다녔습니다. 10살 되던 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이모네 집 단칸방에서 엄마랑 동생이랑 살았습니다. 어린마음에 서러운 적도 있었지만 이모네 집 식구랑 부대끼며 살며 즐거웠던 추억들도 많습니다. 이모네는 아직도 친척들 중에는 가장 가까운 친척입니다. 어려운 시절 저희를 받아 주셨으니까요.


엄마는 이런 환경에서 저를 어떻게든 잘 키워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하지만 PC방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하시느라 얼굴 보기가 어려웠고 가족여행 한번 제대로 가본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밤을 새서 일하실 때도 있었고, 대부분 늦게 들어오셨습니다그러면 저는 엄마를 기다린답시고 늦은밤 치킨을 시켜먹고 컴퓨터로 영화 다운받아서 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제가 같이 보자고 하는 영화를 보다가 꾸벅꾸벅 잠에 드셨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냥 동네 학원 다녔고, 게임 좋아하는 평범한 남학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령 피우는 것을 좋아해서 학원에서 남들보다 문제집을 빨리 풀고는 일찍 보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습니다. 게임은 당시 유행하던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롤플레잉 게임, FPS 게임들... 밤을 새서 하곤했습니다.


처음으로 제 스스로 문제집을 사서 풀고 공부를 했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가 전세집을 얻으셔서 이사를 했고 전학을 갔는데, 제가 원래 살던 광산구보다 학구열이 좀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때는 주변 애들이 하니까 막연히 나도 잘 해봐야겠다 했던 것 같습니다.


변방(?) 광산구에서 중원인 서구로 진출했습니다


그렇게 본 시험에서 반에서 5등을 했는데 반에서 공부를 잘 한다고 하던 애들이 컨닝을 했다고 단체로 걸려서 선생님들께 혼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면서 자랑스럽게 제게 보여주는 것을 보면서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애들은 좀 이상하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 어머니는 문방구도 하셨던 적이 있기 때문에 물건 훔치던 애들에게 더 화가 났습니다)


엄마의 처음 생각은 당시 학군 좋은 곳으로 이사해서 제가 사립 중고등학교 (남학생들만 다니는)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뺑뺑이 돌려서 들어가는 건데 뽑기를 잘못 뽑았는지 동네에서도 공부 안하기로 소문난 남녀공학 중학교 (공립)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 때도 복도에서 레슬링하고 놀고  연애 비슷한 것도 해보고, 오락실 노래방 다니고 오죽하면 엄마는 놀더라도 그냥 PC방 와서 놀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눈 앞에 보이니까 마음이 더 놓였을까요?)


공부는 그냥 엄마가 보내주는 학원 다니고 학교 수업 듣고 시험 치려고 공부하고 그러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도 수학이랑 영어는 곧잘해서 학원에서도 상급반에 다녔습니다. 엄마도 집에 잘 없으니 아무도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워낙 게임을 좋아하다보니, 공부에서도 게임에서 레벨 올리듯이 스스로 레벨업 하는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학원 선생님, 학교 선생님께 칭찬 받는 재미로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암기하는 것을 잘 했습니다. 영어, 역사, 사회, 기술가정 등 문과 과목은 암기하는 게 많아서 

항상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수학도 이해 안가면 그냥 외웠습니다. 친구들에게도 알려주는 것을 좋아해서 쉽게 암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노트를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암기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 자체를 재밌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부시간을 최소화하고 나머지 시간에 놀기 위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암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년간 암기하는 법을 마스터 했습니다. 저는 그런 놈이었습니다.


나만 수학 외운게 아니었네...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상산고라는 사립고가 전북에 세워지면서 거기를 가보는게 어떻겠냐고 엄마가 말하셨는데, 그거 준비하는 과정도 싫고 분위기도 답답할 것 같다고 안 가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사실 중학교 때 노래하고 작곡하고 피아노를 배우는 등 음악에 빠져서 제가 예고에 간다고 할까봐 엄마가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제가 일반고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 에 간다고 하니 엄마로서는 차라리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남자 고등학교에다가 사립고라서 좀 엄격하기로 알려진 학교였습니다. 엄마는 좋아하셨고, 저도 내심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서 불쌍하게 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도 싫었고 심지어 외할아버지는 "후레자식 소리 들으면 안된다"고 직설적(?) 으로 훈계하셨습니다.


당시에 제가 자주 읽던 책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이었습니다. 제가 에드몽 당테스가 되어 저를 깔보는 사람들을 모조리 처죽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성장 드라마나 자기계발서에 한창 꽂혀있던 시기였습니다.


어려움과 누명을 이겨내고 복수에 성공하는 서사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반배치 고사에서는 전교 30등인가 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이제 중간고사를 본다길래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중간고사 보는 중간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 지금까지 점수로는 1등인데 좀 더 잘 해보라고 하십쇼"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정보누설인데 거의 20년 전이니까 그러려니... 어쨌든 저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1등이라는 소리를 듣고  마지막까지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어이없게도 전교 1등을 하게 되었죠. 선행학습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 저는 암기 하나는 끝내주게 잘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일반고 내신은 잘 외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 이후로 저는 내리 1등을 했습니다. 우연히 1등하는 방법을 빠르게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고교 등급로는 두세과목 빼면 전부 1등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졸업 때도 문과 1등으로 졸업했구요.


수업 중에 저는 한번도 졸아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조리 메모했습니다. 국사를 공부하더라도 책 한권만 보는 게 아니라 참고서 여러 개를 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들을 정리하고 모아서 저만의 요약버전으로 만들고, 목차 수준의 큰 틀에서 완벽하게 외운 뒤, 선생님이 시험에 낼 수도 있는 지엽적인 내용은 교과서에서 화이트로 지워버리고 무의식 속에서도 암기를 반복할 수 있도록 완벽한 계획하에 공부했습니다. (모두 중학생 때 요령을 피우려고 터득한 암기법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은 난이도가 확 올라가기 때문에 패턴을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삽자루 선생님 인터넷 강의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엄청 많이 풀고 풀이법을 모두 암기해버리는 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저보다 많이 푼 사람이 없을 때까지 풀었던 것 같습니다. 게임을 하면서 다져진 엉덩이 체력으로 가능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다보니 더이상 아버지가 안계신다는 것은 단점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것을 극복한 스토리로 이해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그 이후부터는 둘러댈 필요 없이 아버지가 안계신다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원래 조퇴를 잘 시켜주지 않는 담임선생님도 제가 아프다고 하면 바로 조퇴를 시켜주는 것을 보면서 공부를 잘하면 이런 메리트가 있다는 생각을 영악하게도 했던 것 같습니다.


단체생활은 제게 잘 맞지 않았습니다. 원래 2학년 올라가면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을 묶어서 기숙사 생활을 시키는데, 저는 어차피 집에서 잘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기숙사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학기 정도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군대를 가서도 알게 되었지만 저는 정말 정말 단체생활이 맞지 않았습니다.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원래 너무너무 좋아하던 게임도 1학년 까지만 하고 2학년 되면서 부터는 모든 게임 CD를 버리고 게임 아이디를 삭제해버렸습니다. 저는 디아블로2 드루이드 클랜에도 가입해 있었는데, 레벨 90넘게 키운 드루이드 5개를 다 버리는게 아쉽긴 했습니다. 그래도 어떤 게임보다도 1등하는 즐거움이 훨씬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곰드루 늑대드루 많이도 키웠는데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1747461


제 공부 스타일은 엄청난 양을 외워서 머릿속에 때려넣는 것이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약간의 건강염려증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면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몸에 좋지 않기 때문에 시험기간에도 최소 7시간은 자야한다." 는 생각으로 깨어있는 시간을 모두 공부하는데 쏟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 쉬는시간 종이 울리면 화장실도 시간 맞춰서 1분만에 해결하고 오고 9분동안 5문제를 푼다" 이런식으로 계획을 세워서 공부했습니다. 옆사람이 말걸어도 제가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면 대답도 안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노는 걸 좋아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중학교 때 썼던 판타지 소설 필명이 '음유시인'이었을까요. 근데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우연히 1등을 하고나니 제 스스로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강박적으로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감도 때로는 들었습니다. 그때는 기분전환을 위해 음악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이적이었습니다. 근데 공교롭게도 이적이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저도 왠지 서울대 가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08입니다... 하늘 같은 선배님 (?)


제 고등학교 시절은 선생님들이 학생을 주먹으로 때려 패고 발로 밟고 발로 차는 등 폭력의 시대였습니다. 자유가 하나도 없는 세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한비야의 책을 읽으며 자유롭게 이 세상을 여행하고 노래하고 글을 쓰며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는데 그때 필명이 '새벽의 달리'였습니다. "해가 떠있을 때는 이성적으로 나 스스로를 속박하여 살아가지만, 해가 지면 살바도르 달리처럼 자유롭게 내 광기를 표출하고 싶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만큼 저는 자유로운 삶을 원했습니다. 제게는 가장 자유로운 직업이 왠지 기자 같았습니다. 왠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세상의 이슈, 현장에 직접 다가가서 취재하는 모습들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2~3 무렵부터 기자를 꿈꾸었습니다.


그 당시는 노무현 정권으로 입시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평가하기 위해 논술고사가 전폭적으로 도입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저희 학교 같은 지방학교는 이런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필요성을 느낀 학생들은 고1 때부터 논술학원에 다니기도 했지만, 저는 거의 고3이 되어서야 이런 변화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내신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지역균형전형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역균형전형으로 서울대학교에 원서를 냈습니다. 지역균형은 논술고사 대신 구술고사라서 왠지 말빨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https://www.snu.ac.kr/snunow/snu_story?md=v&bbsidx=75832


지금 서울대학교 사회대에서는 학과별로 따로 선발하지만 당시에는 광역 모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언론학과가 포함되어있는 사회과학(광역) 모집이 경쟁률이 높았기 때문에 저는 겁이 났습니다. 다른 비교과성적 같은게 거의 없는 제가 과연 전국구 경쟁률을 뚫을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담임선생님과 상의해보고 같은 사회과학대학이지만 커트라인이 약간 더 낮은 인류학과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인류학도 검색을 해보니 사람들의 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 현장으로 가서 연구하는 학문인 것이 제가 추구하는 자유로운 삶과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시 2008학년도 수능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등급제 수능이었습니다. 커트라인은 당연히 넘었지만 수시를 통과하려면 구술면접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구술면접 준비를 위해 수능을 본 다음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남은 시간은 2주정도 되는데 그 기간동안 강남에 있는 학원에서 준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고시원에서 살면서 학원 강의를 듣고 모의 면접을 보는데, 제가 "오르비" 사이트에서 보고들은 최신정보와는 경향이 좀 달랐습니다. 


결국 학원 강의만 믿다가는 필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저 나름대로의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일단 구술면접 지문에 한자가 나온다고 하니 한자 공부를 해야했습니다. 원래 중국어와 한문을 선택했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인류학 지문은 낯설 수 있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교보문고 서점 인류학 코너에 가보니 엄청 오래전에 쓰인 인류학책이 있었고, 옛날 책이라 본문 내용의 주요단어가 모두 한자로 집필되어 있었습니다. 그거 한권을 집어 들고 달달 외웠습니다. 


이 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시사에 대한 내용을 물어볼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준비도 필요했습니다. 학원 수업을 들으면 너무 비슷비슷한 대답만 나올 것 같아서 제가 직접 한해동안 있었던 주요 뉴스들을 전부 리뷰해보고 어떤 질문이 나오더라도 그것을 꿰뚫을 수 있는 대답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어떤 시사문제가 나올지 모르는데, 그 시사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답을 준비한다면,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고등학교에서 단체로 구독했던 논술잡지가 있었는데 (사실 한번도 제대로 펼쳐보지 않았던...) 그것 1년치를 서울로 가져와서 잡지의 "생각해볼 지점" 코너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보고 정리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가장 재밌었던 것은 진중권의 심형래 (D-War) 비판이었습니다. 우리가 특정 이념이라고 인지하지 못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은 민족주의적으로 사고를 하고 있으며, 그것이 문화예술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비평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시사들을 꿰뚫는 아이디어는 결국 소통의 부재라고 보았습니다.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소통할 수 있도록 공론장이 만들어지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렇다면 차이가 있는 사람들끼리 배려하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낙관적이고 초보적인 아이디어였지만, 나중에 사회대 친구가 말해주기를 하버마스의 이론과 비슷하다고 하더라구요.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1년 간의 시사문제에 적용해본 결과 어느정도 그럴듯한 설명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사를 외우기 보다 이 아이디어를 적용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구술 면접을 준비하려면 말을 해야하는데, 고시원은 방음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시원 밖 공터나 놀이터에 나가서 열심히 떠드는 연습을 했습니다. 


면접 전날, 저는 네이버에서 인류학과 교수님 이름을 하나씩 쳐보았습니다. 면접장에 누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알고는 가야겠다고 말이죠. 그러다가 언어인류학자 왕한석 교수님의 검색결과에 이주여성에 관련된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잘 기억 안나지만, 한국으로 이주해 온 여성들이 한국언어를 배우고 나서 소통에 자신이 생기고 갈등이 해결되어가는 과정에 관한 논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어를 습득하는 과정이 단계별로 나와있어서 재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면접 당일,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어제 봤던 그 주제가 시험 지문으로 나온 것입니다. 정확히 같은 논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주여성이 한국에서 겪는 어려움에 관한 글이었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가 구술문제였습니다. 심지어 면접관으로 앉아 계신분이 왕한석 교수님이었습니다. 

 

왕한석 교수님  @ https://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106


저는 제가 지금까지 연습한대로 "이주여성들이 한국어를 배워서 소통능력이 생기는 것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고 배려하게 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이주여성이 사용하는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면 서로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서 "왕한석 교수님의 논문을 읽고 제가 생각한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교수님도 당연히 놀란 표정이셨고, 어떻게 그 논문을 찾았냐고 하자 저는 "네이버"라고 솔직하게 대답해드렸고요. 교수님은 "입학해서 봅시다." 라며 웃으며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한자 문제는 갈등 葛藤 이 나왔습니다. 인류학 책에서 100번은 넘게 나왔던 단골 어휘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운 좋게 서울대 인류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어이없지만 왕한석 교수님 수업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쓰다보니 의대 얘기는 아직 가지도 못했는데 너무 길어졌네요.

다음 글에서는 인류학과에서 어떻게 의대로 가게 되었는지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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