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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Sep 26. 2021

다치거나 해치지 않고 서식할 수 있겠니

<소공녀>(2017)을 보고.

* 아래 글은 문학 플랫폼 던전에 2021년 2월 22일에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 

https://www.d5nz5n.com/work/82/episode/1196 


1.

  영화의 주인공 미소는 청소 일을 하면서 월세, 담뱃값, 위스키 값을 제로섬으로 해결하면서 산다. 미소를 처음 보여주는 영화의 첫 장면이 인상적인데, 이 첫 장면에서 사실 주인공은 미소가 아닌 '집'이다. 깔끔하고 현대적이면서도 적당히 아늑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떠올리게 되는 2-30대 한국 여성의 이상적인 생활공간은 미소의 것이 아닌 그녀가 청소하고 있는 집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학교 동창의 집으로 보인다. 한편 미소가 사는 집은 바퀴벌레가 스스스 벽을 타고 움직이고,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려 해도 너무 추워서 할 수가 없는 집이다. 새해가 되고 담뱃값이 두 배로 뛰자 미소는 간단한 수학을 해본다. 제로섬으로 유지하던 생활비가 적자가 나게 생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살고 있는 집을 포기하는 것이 담배나 위스키를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할 것 같은 것이다. 하여 미소는 방을 뺀 후 큰 트렁크에 살림살이를 넣어서 대학 동창들의 집을 전전하기 시작한다. 


2.

  나는 이 영화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기억했는데, 아는 언니의 말마따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왓챠 코멘트를 보면 "남들의 삶과 비교하면 뭐가 나아지나"라는 감상을 남긴 이들도 있다. 물론 나의 기억도 틀린 것은 아니다. 미소는 정말 벽에 붙은 파리fly on the wall와 같아서 판단을 한다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편이 맞지만, '비현실적인' 삶을 사는 미소를 친구들이 재단하는 만큼 관객 또한 그녀의 친구들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많이 변했는지 보면서 그들의 삶을 평가하게 된다. 이것은 마지막으로 미소가 방문하는 친구의 집에서 정점을 찍는다. 미소는 돈을 많이 버는 남편의 헌신적인 부인이 된 친구를 보면서 대학생 시절 "언니는 참 뜨거운 사람이었죠"라고 말한다. 이전까지는 별말이 없거나 적어도 공격태세를 갖추지 않은 미소가 약간 날이 선 말을 했기에, 이 친구를 끝으로 미소는 더 이상 옛 친구들을 찾지 않는다. 영화의 끝에 우리는 한강 근처에 텐트를 치고 사는 백발의 그녀의 모습을 얼핏 볼 수 있을 뿐이다. 


3. 

  "이 도시에서 좋아함을 사랑하는 자 신선이 되리니."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왓챠 코멘트가 잘 표현했듯이, 미소는 사람이 아닌 일종의 신선이다. 미소의 친구들도, 관객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신선이 될 수 없다. 미소의 친구들은 전부 사회의 중력이 끌어당기는 대로 살아간 것이다. 사회의 중력이 심하게 작용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뜨거운 사람이었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중력은 더 강해지니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고. 나도 이 영화를 본 지 삼 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 중력이 더 심해진 것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지 3년 전에는 이 영화를 보고 마지막 장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가해지는 중력이 훨씬 가벼웠던 그때는 미소와 이 영화가 특정 가치관을 주장한다고 느꼈고 그것에 격하게 동의했다. 그래, 나는 저렇게 속세에 굴복하지 말아야지, 속물이 되지 말아야지. 대학도 졸업하기 전에 저렇게 속물같이 구는 애들이 잘못 사는 것이지. 


  하지만 미소는 진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속세에 굴복하고 속물이 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미소 대 세상', '미소 대 친구들'이라는 이분법을 기반으로 한 변증법은 미소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니까 삼 년 전 나의 해석도, 영화가 미소와 친구들의 삶을 비교하면서 미소의 삶의 손을 들어준다는 감상도 적확하지 않은 것이다. 미소의 친구들이 각자 한 번씩 그녀를 집에 들인 뒤 모여서 그녀를 회상하는 것처럼, 나는 이 영화가 그렇게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미소를, 이 영화를 떠올릴 때 그녀에, 그것에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김혜리 기자의 <소공녀> 한 줄 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 중 하나다. "다치거나 해치지 않고 서식할 수 있겠니." 우리 또래의 다치고도 해치고도 싶지 않은 욕구, 본인의 가치관에 충실하게 임하는 거의 종교적이면서도 자폐적인 생활 방식… 이런 생활방식에 조금의 프라이드가 없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조금이라도 슬프지 않았다고 해도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 삼 년 전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조금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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