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작가의「아가미」를 읽고, 장준환 감독의<털>을 보았다.
철학적 문제
다른 사람에겐 없는 것이 곤에게는 있다.
다른 사람에겐 있는 것이 운도에겐 없다.
그래서 곤이와 운도는 ‘평범함’의 피해자가 된다.
다른 사람에겐 있는 것이 운도에게는 없다.
장준환 감독의 <털>은 학생 때 평론 동아리에서 처음 보았다. 당시에는 욕심, 욕망을 주제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아가미와 엮어 다시 보니 역시 그때와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털>에서는, 털이 있는 것이 주류인 사회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 털이 운도에게는 없다. 운도는 그 평범함을 갖추지 못한 것에 열등감이 있다. 그래서 그 평범함에 집착한다. 이름만 들어도 위험할 것 같은 낯선 성분들을 고마운 물질이라고 여기며 그 리스트를 명랑하게 읊는다. 이 장면에서 감독이 정직하게 깔아둔 복선대로 운도는 부작용을 얻는다. 결국 정말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 된 운도는 눈물을 머금고 그래도 운명에 맞서겠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겐 없는 것이 곤에게는 있다.
불행한 삶의 끝에서 어린 곤에게 아가미가 발견된다. 곤이는 평범하지 않다는 이유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기회를 잃는다. 그것이 곤이가 살아가며 받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곤이의 운명은 할아버지와 강하의 손에서 다루어지며 자주권과 가능성을 박탈당한다. 그렇게 곤이는 물고기가 해류를 따라가듯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가만히 살아간다. 하지만 아가미의 존재는 곤이가 수면 아래에서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었고, 곤이는 그 속에서 자신을 편견없이 받아주는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치며 지상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소속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얻었을 것이다.
평범함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아가미>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아이의 엄마가 느꼈듯, 다수(혹은 주류)의 잣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쾌할 수 있고,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운이 좋아 평범함을 타고났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평범함이란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은 셀 수 없이 많은 선이 만나는 교차점에 서 있기 때문에, 평범하기도 하고 평범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평범’이라는 개념을 경계해야 한다.
202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