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감독의<벌새>를 보고, 틸리 월든의「스피닝」을 읽었다.
어느 개인의 내면을 가만히 따라가는 서사를 좋아한다.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시지에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나한테 닿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작품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벌새와 스피닝의 두 주인공이 나와 다른 시대를 살거나(은희) 다른 문화권에 속함에도(틸리), 그들이 겪는 갈등에 나의 경험들이 겹쳐 보여서 마음에 깊게 남는다.
은희와 틸리는 스스로가 타자와 다른 인간으로 느껴지는 어느 지점에 있다. 좋아했던 일이 더는 즐겁게 느껴지지 않거나 일상을 공유하던 누군가와 마찰이 생긴다. 그 시간의 흐름에서 흩어지고 단단해진다.
과거의 나는 자의든 타의든 곁에 있던 무언가를 놓아야 할 때마다 엄청난 감정소모를 겪어야 했다(그래서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유리가 짱 멋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거듭하며 예전보다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
보편적인 이야기
은희는 1994년 어느 날을 `살아가던` 14살 여학생이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자, 그리고 좋은 성적이 곧 권력으로 작용하는 한 시대의 학생. 은희는 그 폭력적인 상황을 견디고, 살아간다. 그 궤적에서 영지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담배를 피우던 영지를 별스럽게 여긴듯한 창가 앞 첫 만남부터 영지가 떠난 뒤 그의 방에서 그의 시간을 짐작하기까지, 영지의 모습은 오로지 은희의 시선으로만 존재한다. 영화에서 영지의 어린 시절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은희에게 폭력에 맞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그도 아마 은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여겨진다. 어쩌면 은희보다 수희의 삶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건 아마 수희의 이야기도 영지의 이야기처럼 내 상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집안의 첫째여서일까, 이상하게 수희를 자꾸 보게 된다. 수희도 수희만의 또 다른 세상이 있겠지.
가부장제가 가진 폭력성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희와 은희의 유대감이 안쓰러우면서도, 수희도 은희도 외딴 섬에 있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특히 붕괴한 성수대교에 찾아간 장면이 그랬다.
성수대교의 붕괴를 계기로 단절되었던 은희의 가족은 이어진다. 가족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그 감정의 해소 후에 온 것은 당연하게도 서로의 소중함이다. 이 흐름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보편적인 정서이다.
벌새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을 이야기하고자 했고, 그 보편적인 정서에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벌새는 나에게 우롱차 같은 영화다. 별다른 자극 없이 밋밋한듯하면서도 자꾸 홀짝이게 되는 매력이 있다. 김보라 감독님의 차기작이 매애애애우 기대된다.
한 시대를 과감하게 정리하는 용기
스피닝은 주인공 틸리의 한 시대를 담고 있다. 열일곱의 주인공이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한 스케이팅을 정리하기까지의 심리 상태를 주요 골자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갈등을 이야기한다.
어렸을 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붓 몇 획을 남겨두고 으레 그만두곤 했다. 그림을 완성하면 나를 포함한 누구에게든 그림에 대한 평가가 따라온다는 생각 때문에 완성하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피겨 스케이팅에 회의감을 느끼는 그 시간을 감내하고 합격증을 받고 나서야 피겨 스케이팅을 그만두는 틸리의 끈기와 용기가 대단하게 여겨진다.
성장통은 이미 충분히 겪은 것 같은데, 때때로 목적지가 어렴풋하다. 길을 잃었을 때는 몸이 얼마나 힘들어야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지 궁리한다. 편안함을 거부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자신을 혹사하는 틸리(235p)를 보며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틸리는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탐구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 영지의 말처럼, 힘들 땐 손가락을 보며 나를 보듬을 시간을 가져야겠다.
20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