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넷 엄마, 다시 대학생이 됩니다.
Mary는 필리핀계 키위였다. 벌겋게 상기된 나의 얼굴을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아마도 아주 오래전 이 땅을 밟았을 그녀의 엄마를 떠올렸을 것이다. 수십 년 전 이 땅을 밟았을 Mary의 엄마, 그리고 아들 넷을 데리고 무모하게 이 땅을 밟은 나. 외국인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으로 이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1세대의 희생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붉게 물든 나의 눈동자와 이제 붉게 타오르기 시작한 그녀의 눈동자가 만났다. 그 순간 나의 두 뺨에 눈물이 도르르 흘러내렸다.
“제발 도와주세요. 저희 남편을 데려오는 걸 도와주든지, 아니면 최소한 제가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Mary는 내가 살고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의 보좌관이었다. 독학으로 IELTs 7.0이라는 점수를 만들고, 작년 9월 대학교 입학시험/인터뷰를 통과한 후 내게 남은 건 학생비자를 받아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체류하고 있는 가디언 비자는 아이들을 돌보는 주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비자였고, 뉴질랜드 국경 내에서 다른 비자(학생비자, 워크 비자)로의 전환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비자였다.
"불가능합니다. off shore(국외)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더구나 아이들도 어리고 네 명이나 되시잖아요."
유학원, 이민 법무사, 이민 변호사... 그동안 수많은 전문가들과 상담을 했지만 대답은 같았다. 대부분 내 케이스를 꺼려했다.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내 케이스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부분이기에 어쩌면 그들의 대답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팬다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민성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언가 있지 않을까.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남편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부분은 아무리 국회의원이라도 도와드릴 수 없어요. 그렇지만 학생비자가 거절되었을 때는 도와드릴게요. 국회의원 이름으로 된 오피셜 레터를 이민성에 보내드릴게요. 약속해요.”
Mary의 흔들리는 목소리에서 잔잔한 파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곧이어 침착한 어조로 나에게 이야기했다. 도와주겠다는 말이었다. 지역구 국회의원을 찾은 건 내게 일종의 플랜 B였다. 학생비자가 만약 거절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악다구니 같은 몸부림이었다.
작년 9월 Katy Armstrong이라는 키위 법무가가 나를 도와주기로 했다. 그녀는 뉴질랜드 법무사로 TV 뉴스에도 출연한 적이 있고 국회의사당에서 열리는 이민 관련 회의에도 참석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는 유능한 법무사였다. Katy는 시도는 할 수 있지만 확률이 없는 싸움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둠이 짙게 깔린 길고 긴 칠흑 같은 터널을 들어가겠다는 내게 손을 내밀어준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였다. 그녀에게 쓴 나의 장문의 편지가 아마도 한 여성으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그녀를 움직이게 한 모양이었다.
“이 모험을 한다고 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잃게 될까.”
아들 넷 엄마라는 타이틀은 잃을 게 없는 포지션이었다. 엄마라는 자리는 오히려 지난 시간 동안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세 쌍둥이를 출산하고 8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그때 나는 글을 쓰게 될 줄 알았을까. 연이어 두 권의 책을 출간하게 될 줄 알았을까. 어느 날 갑자기 아들 넷을 데리고 뉴질랜드라는 곳으로 홀로 떠나게 될 줄 알았을까. 코로나가 터지게 될 줄 알았을까. 1년 반 넘는 지난한 시간 동안 남편을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았을까. 엄마라는 자리는, 더욱이 아들 넷 엄마라는 자리는,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가끔은 거침없고 무모한 결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리게 만든다.
물론 이 말이 이번 결정을 충동적으로 내렸다는 것은 아니다. 뉴질랜드의 국경 통제가 장기화되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정말 나는 수없이 고민했다. 가끔씩 남편이 눈물을 보일 때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나의 심장이 끝도 없이 깊은 심연의 어느 바다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곳에 너무나도 잘 적응해준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새파란 하늘과 초록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티 없이 해맑은 얼굴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도대체 무엇이 맞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과연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 만약 돌아가게 된다면 아이들은 학교에나 제대로 갈 수 있을까. 마스크를 끼고 살아갈 수 있을까. 또다시 겪게 될 층간소음 갈등을 감당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희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될 그날은 아직도 불투명했다. 빽빽한 안갯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내 인생도 그러했다. 나는 과연 돌아가서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지난 5년간 글을 쓰며 전업 작가로서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글을 통해 경제적으로 독립된 개체로서의 현실적인 성취감을 느끼기는 부족했다. 5년 간 글을 썼지만 나에게는 수입이 전무했다. 나의 삶은 전업 작가라는 타이틀보다는 여전히 아들 넷 엄마에 가까웠다. 그런데 뉴질랜드에서 이 공부만 마치게 되면 나는 교사 자격증을 딸 수가 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의 아이를 가르칠 수 있다. 졸업과 동시에 워크 비자를 받으면 아이들의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고, 부족 직업군에 교사가 포함되어 있기에 향후 이민까지 계획해볼 수 있다. 유치원 교사가 되었을 경우 처우도 훨씬 좋다. 졸업 후 초봉이 27~32불 사이로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높은 편이고 교사에 대한 대우도 정말 좋은 편이다. 야근도 없고 근무시간도 탄력적이다. 아들 넷 엄마인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 인생에 더는 잃을 건 없어. 두려운 것도 없고...”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잃을 게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거절될 가능성이 크지만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크게 남을 것 같았다. 지난 2월 비자 신청을 위해 여러 서류를 준비했다. 2명의 Support letter를 비롯해, 6명의 Reference letter를 함께 제출했다.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했던 호스피스 샵 매니저, 동료, 세 쌍둥이 유치원 교사, 컬리지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이웃, 현재 국제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하는 캐나다 출신의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 등. 그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비록 아들 넷의 엄마이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이 공부를 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인지를 담은 레터를 써주었다. 그들의 레터를 읽으며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비자를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이 모험이 값질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애쓰며 살아온 것 같았다. 충분히 잘 살아온 것 같았다. 한 명 한 명의 레터가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비자 전환을 위해 시작한 기약 없는 기다림은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기약 없는 기다림을 지속한다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하루에도 수십 번 메일함을 열어보았고 매일 초조한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정말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뚜렷하지는 않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만져졌다. 불투명한 직감이었고 기대였다. 그 느낌은 언젠가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서 가느다란 바늘 하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한 줄기 빛 같은 희망이었다.
“정말 축하해요. 드디어 학생비자가 나왔어요. 당신 케이스가 우리 회사 전 직원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Katy는 기뻐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녀도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했다. Katy와 동료들은 당사자인 나보다 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기뻤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드디어 해냈구나. 정말 해냈구나... 그동안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수없이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한 직감이 나를 버티게 하였다. 끝도 없는 오기가 나를 다시 그 자리에 머물게 하였다. 그렇게 나는 결국 해내었다.
나는 항상 생각한다.
개인의 의지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쉽게 포기하는지.
조금만 힘내 자신을 믿으면 어떤 삶의 변화를 만날 수 있는지.
설령 그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그거면 되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다면 그거면 되었다.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한 발자국 나아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 얼마 후면 정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대학생이 된다. Graduate diploma라고 기존 학사학위가 있는 학생이 대학 학부 공부를 1년 반 만에 마치는 과정이다. 가끔은 아들 넷을 홀로 육아하며 풀타임 공부를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온다. 그러나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부딪혀보려 한다. 힘든 길인 줄 알면서도 부딪혀왔던 사람.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