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후의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나는 내 삶이 기대된다.
몸은 의식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반응한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고 이윽고 나는 꺼억 꺼억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렸다. 고딩엄빠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어린 엄마가 출근한 남편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아기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 그녀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고 눈망울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아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온몸에 잠들어있던 기억들을 깨우고 있었다. 터질 것 같았던 그때의 감정들이 나를 감쌌다. 세 쌍둥이의 끝나지 않는 울음소리에 온몸을 웅크리고 라디오 소리에 집중했던 불안했던 나의 모습과 그 감정의 쓰레기들을 미친 듯이 글을 쓰며 토해내었던 그때의 내가 스쳤다.
큰애를 낳고 스물일곱의 어린 나이에 시작한 육아는 외로웠다. 아기 띠를 매고 이야기할 누군가를 찾아 집 앞 놀이터를 뱅뱅 돌다 다시 집으로 들어갔었다. 공채로 들어간 대기업에서 출산으로 인해 입사 2년 차에 육아 휴직을 했다. 이제 활발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동기,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라는 이름의 삶은 당시 내게 너무나도 어색한 것이었다. 다섯 시가 되면 당시 공군 장교였던 남편이 퇴근했다. 네 시부터 시계를 쳐다보고 또다시 쳐다보았다. 남편이 출근한 하루는 잔인할 만큼 더디게 지나갔다.
남편이 없으면 불안해요. 남편이 집에 와야 안정되거든요.
영상 속의 어린 엄마는 남편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이야기했다. 첫 애를 낳고 외로웠던 나의 첫 번째 육아가 스쳐 지나갔다. 남편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울이는 육퇴 후 맥주 한잔이 삶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세 쌍둥이를 출산한 뒤 육 개월이 지났을 때 내가 몸담고 있었던 회사에 대한 뉴스가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하루아침에 법정 관리에 들어가게 된 나의 회사. 이 회사는 내 20대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었던 유일한 결과물이었다. 좋은 대학에 나와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게 행복의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것은 삶에 커다란 반향점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그것은 비단 삶에 대한 회의감 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고 믿고 옳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한 배반과 부정이기도 했다. 상실감, 우울, 슬픔, 분노, 불안. 모든 감정의 쓰레기들을 글을 통해 쏟아내었다. 글쓰기는 마음을 정화시켜 주었고, 나아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들여다보고 성찰하며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2년 동안 잇따라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세 쌍둥이는 어느덧 세 돌이 되었고 나의 몸도 예전보다는 훨씬 많은 자유를 되찾았다. 그런데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스물두 살에 어학연수를 갔던 캐나다에서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생경한 도시에서 풍겨오는 그 바람의 향기를 다시 맡고 싶었다. 아무 연고도 없이 밴쿠버를 찾았던 스물두 살의 무모함이 그리웠다.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직감을 따랐던 그 무모함이, 그 기분 좋은 긴장감이 그리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내 커리어에 더 이상 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내 커리어는 리셋되어 하얀색 도화지가 되었지만 그것이 절망감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새로운 무언가를 다시 그려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설렘이 더 컸다.
2020년 1월. 아들 넷을 데리고 무작정 뉴질랜드로 갔다. 왜 뉴질랜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곳이었고 준비 두 달 만에 충동적으로 날아갔다. 짧게는 일 년에서 길게 삼 년으로 계획했다. 아이들이 자연 가까이서 행복하게 뛰어 놀기를 바랐다. 물론 언어의 목적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하며 자랄 수 있었으면 했다. 다채로운 삶의 경험 만한 삶의 공부는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 부모로서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주었다. 아이들은 뉴질랜드를 좋아해 주었고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내가 아이들을 위해 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다. 네 아이의 국제 학비는 장기적으로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기에 내가 새로운 공부를 해서 취업을 하고 내 터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유아 교육을 전공하면 뉴질랜드 교육청에서 국가 공인 자격증이 나오고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될 수 있다. 유치원 교사는 뉴질랜드의 부족 직업군이기 때문에 취업과 이민 전망이 좋은 직업이었다. 한 달 만에 독학으로 아이엘츠 7.0 점수를 만들었다. 뉴질랜드 이민성에 학생 비자를 신청했고 오랜 기다림과 설득 끝에 비자를 받았다. 생각만큼 공부가 쉽지는 않았다. 혼자 네 아이들을 케어하면서 공부, 과제, 강의, 실습을 해야 했다. 중간에 허리 디스크가 악화되어서 앉을 수가 없어 일어나서 한 시간, 누워서 한 시간 그렇게 번갈아 가며 공부했다. 2년 넘게 굳게 닫혔던 뉴질랜드 국경도 나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만들었다. 지난 5월 국경이 열리기 전까지 남편 없이 2년 반이라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삶이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같이 느껴졌다.
쉽지 않았지만 새로운 공부가 재밌기도 했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좋은 성적을 받았다. 전체 아홉 과목 중, 다섯 과목 (distinction 최우수), 세 과목 (merit 우수), 한 과목 (Pass)였다. 그저 패스만 해도 졸업할 수 있었지만 운이 좋게도 정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학교의 뉴스 레터에 나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학교에서 내가 아들 넷을 혼자 돌보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홍보팀에서 수기를 써달라고 연락이 왔다. 취업도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졸업하기 두 달 전에 경험 삼아 지원해본 유치원에서 첫 인터뷰 만에 Job offer를 받았다. 얼마 전 교육청에서 교사 자격증을 받았고, 다음 달 이제 나는 뉴질랜드 교사로서 새로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나의 첫 책 <어느 날 갑자기 벼락 엄마>의 프롤로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녀의 인생은 스물여섯 가을 부산행 기차를 탄 그날부터, 인생의 짝을 만난 바로 그 기차에서부터 끊임없이 오르내리고 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지난 나의 삶을 반추해보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삶이 힘들 때마다 나는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처럼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했다. 벗어날 수 없는 아들 넷 엄마라는 삶의 테두리가 잔인하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앞으로 어떤 것들을 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진 적도 참 많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매 순간이 최고일 수는 없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게 나니까. 나라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나의 미래가 기다려진다. 지난 십 년 동안 겪었던 다채로웠던 삶의 경험들이 나의 내면을 여물게 만들었듯이 나는 앞으로 아름답게 늙어갈 나의 모습이 참 궁금하고 기대된다.
인생은 참 재밌다. 뉴질랜드에서 교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이곳에서 공부하고 일한다는 것을 상상해보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인생에 쓸모없는 시간은 없었다. 무의미한 시간은 없었다. 실업자가 되고, 스스로 쓸모없다고, 무능력하다고 여겼던 지나간 시간들도 지금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던 시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영상의 어린 엄마에게 진심을 담아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인생에는 쓸모없는 시간이란 없어요. 무의미한 시간도 없어요.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세요. 그리고 사랑하세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오늘의 사랑스러운 내 아이들을.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