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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un 05. 2023

<인생에 핑계 대는 당신에게>

“한 달 후에 갈게. 그때 봐.”


“응. 그때까지 애들 잘 키우고 있을게. 한 달 금방 갈 거야.”


눈을 감으면 그때가 선명합니다. 남편과 작별했던 오클랜드 공항, 우리 부부는 여느 때처럼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쿨하게 헤어졌습니다. 출국장 앞에 서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크게 벌려 하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한 달 후면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를 다시 만나기까지 앞으로 2년 반이라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요.




2020년 1월, 저는 아들 넷을 데리고 홀로 뉴질랜드로 떠났습니다. 큰애는 9살, 세 쌍둥이는 3살, 기저귀도 채 떼지 못한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저는 연고도 없는 뉴질랜드로 날아갔습니다.


“넌 정말 유별난 애라니까. 이제 애들 조금 컸다고 살만 해지니 어디에 가겠다고? 왜 넌 항상 힘든 길로 가려고 하니.”


갑자기 떠나겠다는 제 말을 듣고 친정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저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마음먹으면 꼭 해야만 하는, 딸 부잣집 못 말리는 둘째 딸, 한 고집이었거든요.


저에게는 남들에게는 말 못 할 별명이 있습니다. 대학시절, 캐나다와 미국을 홀로 여행하고 온몸에 얼룩덜룩한 진드기 물린 자국과 함께 돌아온 저를 보고 아빠가 지어준 별명입니다.




“야생마다! 야생마야.”


저는 아직도 아빠의 탄식이 섞인 그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때 아빠는 생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시집 못 가 제일 골치 썩일 것 같던 둘째 딸이 가장 먼저 결혼해서 애 엄마가 될 거라는 것을 것요. 그것도 아들 넷 엄마가 될 거라고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배낭여행을 좋아했습니다. 패키지여행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유명한 관광지에 가는 것보다 어느 작은 마을의 시장에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여행은 굳이 계획하지 않습니다. 좋으면 더 머물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제게 두려움보다는 설렘이라는 단어에 가깝습니다. 미지의 어딘가를 상상하면 제 몸에 여러 개의 세포 알갱이들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느낌이 듭니다.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저는 그렇게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아무도 인도 여행을 하지 않던 20년 전, 류시화 작가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인도 배낭여행을 한 달간 다녀오기도 했고, 아이들을 낳고 나서는 어린이집이 끝나고 돌아온 아기들을 데리고 즉흥적으로 베트남으로 떠나기도 했습니다. 큰애를 데리고는 알래스카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때 알래스카의 정기를 받고 덜컥 임신한 게 세 쌍둥이입니다. 알래스카 마타누스카 빙하 아래의 허름한 호스텔에서 하늘은 저에게 세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 쌍둥이의 태명은 알, 래, 스카였습니다.




그러나 질주해야 사는 야생마에게 아들 넷 엄마라는 타이틀은 잔인한 운명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무서웠습니다. 누구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제게 엄마로만 살라는 것은 마치 제 삶을 포기하라는 차디찬 선고로 들렸습니다. 결국, 저는 8년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했습니다. 네 아이를 맡아줄 이모님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고, 두 명의 이모님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세 쌍둥이가 생후 130일이 되던 날부터 홀로 독박육아를 시작했습니다.




회사는 퇴근을 하면 쉴 수가 있는데 육아라는 것은 퇴근이 없었습니다. 세명의 신생아는 밤마다 열 번 이상씩 일어났고 저는 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잊은 채 한 마리 좀비가 되어 육아를 이어갔습니다. 끊이지 않는 세 아기의 울음을 듣고 있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가슴속에 뜨거운 것이 차오를 때면 그것은 이윽고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젖병과 빨래, 나를 바라보는 가여운 세 아기들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과연 나는 이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내 삶을 살 수 있을까?’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하늘은 야속하게도 나에게 이러한 벌을 내리시는 건가…’




저는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박고 숨을 죽이며 울었습니다. 좋은 대학, 좋은 회사. 저는 모범생이었고 그저 남들처럼 열심히 달리며 살았습니다. 독하게 경쟁하며 달렸습니다. 왜 경쟁해야 하고, 왜 달려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달려야 하니까. 뒤쳐지면 안 되니까. 모두 다 달리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되돌아보니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정말 허탈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야생마가 아니라 경주마였다는 것을요. 눈을 가리고 달리기만 했으니까요.




회사를 퇴사하고 저는 제 눈을 가려왔던 안대를 벗었습니다. 경주마가 아닌 야생마로 살기로 했습니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마음껏 부딪히고 즐기기로 했습니다. 뉴질랜드로 떠났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왜 뛰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뛰어야 하는 경주마가 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자기가 정말 원하는 행복을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무엇보다 혈기왕성한 아들 넷이 자연 가까이서 구르고 뛰며 마음껏 에너지를 발산하며 자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들 넷을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큰애는 일 인용 유모차를, 저는 쌍둥이 유모차를 끌었습니다. 조촐하게 이민가방 2개가 짐의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도착한 다음 주,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뉴질랜드 국경이 닫혔대.”


“에이. 무슨 국경을 하염없이 닫을 줄 알고. 그게 얼마나 경제적으로 타격인데. 길어도 6개월이야.”




코로나는 예측불가한 제 삶을 더욱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추측만 무성할 뿐 어느 누구 하나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하염없는 기다림, 그것은 마치 빼곡한 안갯속을 걷는 절망감이었습니다. 뉴질랜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봉쇄정책(제로 코로나)을 실시했습니다. 남편이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한국의 코로나 상황은 심각했기에 마스크를 끼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이곳에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아야 했습니다. 처음에 뉴질랜드에 왔을 땐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터지고 이곳에 반강제적으로 머물게 되자 이 시간을, 이 기회를 즐겨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교사는 부족한 직업군이라 나중에 취업도 용이하고 영주권까지도 도전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달 만에 영어점수를 만들고 대학시험에 통과했습니다. 뉴질랜드 이민성을 육 개월동안 설득해서 어렵게 비자를 받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들 넷을 양육하며 대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세 쌍둥이를 키우며 허리 디스크가 생겼는데, 공부를 하면서 허리가 악화되자 누워서 공부하는 책상을 구입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나 4개의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공부를 하고, 교육 실습을 하고, 과제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모든 것이 영어로 진행되었기에 공부도 과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실하게 공부를 이어 나갔습니다. 총 9개의 과목 중 8개의 과목에서 최우수 성적을 받았고 학교의 뉴스레터에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작년 졸업을 했고 초등학교 3학년까지 가르칠 수 있는 교사 면허를 취득해서 유치원교사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2년 반 만에 꿈에 그리던 상봉을 했습니다.




지난 3년, 정신없이 쓰나미가 휘몰아쳤던 것 같습니다.



“그때 남편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때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돌아갔더라면…”


“만약 내가 대학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삶이 힘겨울 때마다 수백 번, 수천 번,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흔이라는 나이의 자락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인생을 돌이킨다고 더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간 후회에 연연하기보다 현재의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것, 저는 이제야 삶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거침없이, 후회 없이’


  저는 언젠가의 저의 묘비명을 미리 만들었습니다. 5년 전의 저는, 과연 제가 지구 반대편 어느 작은 나라에서 선생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과연 언제까지 이곳에 있게 될까요?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이곳을 떠나게 되지는 않을까요?




  인생이란 참 재밌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졌던 순탄치 않았던 시간들이 참 감사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 성장하고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제 마음의 주인으로, 부딪히고 덜 어내며 살아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달릴 겁니다. 제 눈을 가렸던 안대를 걷고 제게 주어진 길을 바라보며, 그렇게 저는 한 마리 야생마처럼 저의 길을 <거침없이, 후회 없이> 나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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