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하루가 또 시작되었다
아침은 늘 정신을 붙들어야만 한다.
1분 1초라도 허투루 쓴다면 그것은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참아야 하는데 하품이 연신 터진다.
졸린데 춥기까지 하다.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잠이 깬 건 텅 빈 뱃속뿐인가 보다.
이곳 뉴질랜드는 집이 춥다. 마흔이 되니 추위를 부쩍 많이 탄다.
한증막이나 온돌방에 누워 뜨끈하게 몸을 지지고 싶다.
온풍기 식의 이곳 난방은 단점 그 자체다.
켜면 전기세 폭탄이요, 끄면 찬바람 쌩이다.
서둘러 아이들 도시락을 준비한다.
이곳 뉴질랜드는 급식이 없어 도시락을 매일 싸야 한다.
평생 엄마가 싸주던 도시락을 먹을 줄만 알았다.
새벽같이 아이들 도시락을 싸는 이런 인생을 살 줄 몰랐다.
우리 엄마는 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키우셨다.
예쁜 세 딸 공주처럼 키워 주셨다.
지금도 엄마집에서 설거지라도 하려고 하면,
시댁 가서 하라고 여기서는 안된다고 극구 나를 말린다.
친정도, 친구도, 남편도, 아무도 없는 이곳.
아직도 가끔 엄마의 포근한 가슴팍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
아이들의 엄마이기 전에 나도 사랑받는 누군가의 딸이었는데,
억척스러운 엄마이기 전에 나도 연약한 여자였는데,
힘들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아프지 않은 척, 강한 척.
나이를 든다는 건 가끔은 두려운 일이다.
두려운 게 사실 하나 더 있다.
늘어가는 영양제와 약들.
대부분 허리 디스크 때문에 먹는 약들이다.
아들넷을 홀로 육아하며 퇴행성 허리 디스크가 생겼다.
추간판 탈출증에 좌골신경통, 방사통까지
나이를 먹으니 낯선 병명들이 늘어진 혹처럼 주렁주렁 달린다.
난 태생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다.
난 태생적으로 육아도 잼병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을 사랑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내가 아들넷의 엄마가 되다니 한때는 신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병원에선 세 쌍둥이를 선택유산하라고 했다.
그런데 그 선택이라는 단어가 난 참 무서웠다.
누굴 선택하라는 말,
내가 마치 조물주라도 되어 어떤 아이를 선택한다는 것이,
난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끝까지 아이들을 품었다.
내가 어떻게 되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이렇게 예쁜 보물들.
하지만, 아침에는 말도 지지리 안 듣는 밉상들이다.
아들넷을 키운다는 건 지난한 인내심의 여정이다.
결국 또 지각하게 생겼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아침은 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아이들을 내려준 뒤 재빨리 일터로 향한다.
뛰는 건 나에게 일상이 되었다.
나는 뉴질랜드 유치원 교사다.
3년 반전 유학생 엄마로 왔다가 코로나가 터지고 이곳 대학에 다시 들어갔다.
그때는 심각한 코로나 상황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코로나가 길어지자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사실 공부를 하게 된 건 아이들의 학비 때문이었다.
이곳 뉴질랜드는 졸업해서 취업비자를 받는 순간부터
아이의 수에 상관없이 아이 학비가 면제된다.
네 명의 아이를 공짜로 학교에 보내고 있으니 이것 만으로 나는 돈을 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뉴질랜드에서 유치원 교사는 3D잡 중 하나이다.
아이엘츠 7.0 이상의 높은 영어점수가 필요한 직업이지만,
실상 들여다보면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도 힘든 직업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건 물론 온갖 궂은 청소, 설거지, 서류 작업을 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8년간 대기업에 다녔고 치열하게 공부했던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에게는 야무지고 패기 넘쳤던 언제나 자랑스러운 둘째 딸이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딸은 어느 날 갑자기 아들 넷 엄마가 되었고
그동안 이룬 모든 걸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내려놓아야 했다.
타지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 걸 부모님이 아신다면
아마도 눈물을 흘리실 것 같다.
나 조차도 이런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으니.
8
아이들은 날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른다.
마음을 나눈다는 거에는 국경이 없다.
짭짤한 코딱지를 먹는 아이, 장난감 빼앗겨 우는 아이, 수다스러운 아이, 소심한 아이.
아이들은, 아니,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다.
잠든 아이들을 볼 때면 가슴 한편이 찡해진다.
세명의 아기를 키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
아기들이 자지 않으면 빨리 자라고 소리쳤고,
수면교육이랍시고 아기들이 스스로 자도록 훈련시켰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이상 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잠든 아이를 볼 때마다 파도처럼 죄책감이 밀려온다.
아마도 내가 유치원교사가 된 것은 그 시간을 돌아보라는 누군가의 설계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엄마가 되어가는 이 지난한 여정은
자신밖에 몰랐던 이기적인 인간이 삶을 깨달아가는 성찰의 시간이었다.
일이 끝나고 다시 엄마로 돌아온다.
오늘은 아이들 독감주사를 맞는 날이다.
이곳 뉴질랜드는 만 13세 이하의 아이에게 독감주사를 무료로 맞춰준다.
작년에는 주사 맞는 걸 무서워하던 아이들이 올해는 제법 씩씩해졌다.
주사 잘 맞으면 장난감 사준다는 말 때문이었나 보다.
장난감을 사주고 오랜만에 외식을 하니 오늘 일당이 스치듯 안녕, 사라져 버린다.
영혼 끌어모아 하루 버티는 하루살이 같은 삶.
난 언제까지 이 나라에서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아빠 없는 이런 삶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어느덧 해 질 녘의 어스름이 하늘에 번진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나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빨래를 하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밀린 서류 업무를 한다.
문득 마흔의 나를 바라본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주름과 주근깨가 내려앉았다.
그래도 나는 마흔의 내가 좋다.
삶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난, 내 아이들의 엄마가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