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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뺨 Jun 11. 2021

김고독씨의 오늘 하루

나란 사람

'죄송합니다. 서류전형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요가 강사로서의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다시 구직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지난 2년간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네요. 코로나 탓을 댈까 부상 탓을 댈까 어쨌든 재미난 모험이었습니다. 이제 20대의 구직 경험을 바탕으로 40대의 구직 도전을 시작해볼까요? 그런데 실패 끝의 좌절을 딛고 다시 도전하기란 쉽지 않아요. 낡은 노트북의 오래된 폴더에서 조잡한 이력서 파일을 찾아냅니다.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등록만 하고 외면하기를 며칠, 다듬지 않은 이력서를 아무 데나 보내보는데 또 며칠 그리고 기업 홈페이지에서 직접 지원해보기까지 또 며칠이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어젯밤 이부자리 위에서 불합격 통보 쏘리 레터를 확인했습니다.


당연히 잠에 들 리가 없죠.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다가 스스로가 대단하기도 했다가 스스로를 자책도 했다가 스스로를 위로도 했지만, 새벽에 화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치밀어 올랐습니다. 허공에 대고 버럭 소리를 내질러 보다가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갑자기 차투랑가 단다아사나를 몇십 번 이어나갑니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나서야 동작을 멈췄어요. 그리고 사바사나. 그제야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서 묵직한 빗소리가 들립니다. 새벽의 찬 공기를 폐에 가득 차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왜 화가 났던가 되짚어 봅니다. 그래, 너무 미래에만 신경을 쏟다 보니 불안했던 거구나. 그래서 한동안 그렇게 무기력했구나. 또 그런 모습에 실망했던 거구나. 화났던 마음을 토닥이며 잠자리에 돌아갔고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짜잔.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오지요. 백수가 되니 좋은 점도 있네요. 늦잠을 자도 삶에 지장이 전혀 없습니다. 느릿느릿 눈곱을 떼고 치아 유지 장치도 뗍니다. 가그린으로 입안을 개운하게 하고 향도 피웁니다. 다시 매트를 펴고 저만의 모닝 플로우를 이어갑니다. 이런, 배가 고프네요. 밥 먹을 준비를 해볼까요? 예쁜 접시를 꺼내서 정성껏 반찬을 담고 따뜻한 현미밥을 풉니다. 꼭꼭 씹어 넘겨서 배를 채웠으니 설거지를 해야죠. 설거지까지 마쳤으니 상한 마음을 치유하러 나가봅니다. 산책. 푹신한 흙길을 걷자 굳었던 마음이 풀립니다. 밤새 내린 비로 흙냄새와 풀냄새가 숲 속 가득합니다. 네이버 스마트 렌즈로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꽃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찾아보고 그 이름을 불러봅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 끝마다 고맙다고 나지막이 읊조립니다.


  

고맙다, 느릅나무야

고맙다, 노랑국수야

고맙다, 애기똥풀아

고맙다, 강아지풀아



'나 역시 이름 모를 존재가 아니다. '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 내 이름이 불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많은 이름들을 찾아 불러보았습니다. 보기 부끄럽고 왠지 부담스러웠던 이력서를 대면할 준비가 되었나 봅니다. 마음의 에너지가 차오르자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네요. 오늘 하루를 차분히 열고 열심히 살아냈으니 선물을 해주자. 2시간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1400원을 주고 차가운 포카리스웨트를 한 캔 삽니다. 바로 나와서 캔을 따고 원샷해요. 크으. 편의점 재활용 쓰레기통에 빈 캔을 쏙 집어넣고 나와요. 어젯밤 화났던 마음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왔습니다. 그나저나 저는 취직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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