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센스
중학교 교문 앞, 입시미술학원에서 홍보를 위해 멋진 그림이 그려진 노트를 나눠주곤 했다. 입시미술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수채화부터 아름다운 일러스트 까지, 표지가 매 달 바뀌는 노트를 품에 안고 등교했다. 표지를 보며 이런 그림은 누가 그리는 걸까 생각하며 따라 그려보았던 기억이 있다. 평소 미술수행평가는 항상 A를 받았기에 생긴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나’ 하고 중간에 노트를 덮었다.
이 다음 이야기가 미술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학원에 등록하는 이야기라면, 아마 미술학원에서 홍보를 잘했다며 뿌듯해하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피엔딩은 없었다.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에겐 부족한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음악, 미술, 체육 줄여서 음.미.체라고 부르던 예체능 과목들은 타고남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멀리뛰기는 거의 꼴찌였고 피아노는 박자를 못 맞췄다. A받은 소묘화지만 눈에 띄는 무언가가 없었다.
눈에 띄는 무언가, 그 무언가가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재능이 없었다. 갓 스무살 여름방학,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어간 대학 동아리. 동아리에서 연 사진전 포스터 공모에 참여하기 위해 포토샵을 독학했다. 다루는 방법을 속성으로 배우는데 한 달이 걸렸고 디자인을 완성하기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괜찮다는 평가로 내 포스터가 선정이 되었다. (툴을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동아리 활동이 끝날때까지 매년 포스터를 만들게 되었다.
‘재능은 꽃 피우는 것, 센스는 갈고 닦는 것’. 배구를 소재로 하는 소년만화에서 한 등장인물의 대사다. 한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능력있는 캐릭터지만 날고 기는 선수들 사이에서 재능이란 무엇인지 고민한다.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겠지만 부족한 재능은 센스를 키우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저 한 마디지만 와 닿는 문장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든 사진전 포스터에 재능은 보이지 않았지만 센스는 담겨있었다.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아는게 있다면, 재능이 없다고 못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친구들 생일선물로 캐리커쳐를 그려주고 싶어서 몇 달 동안 틈틈히 연습했었다. 그 다음 해에는 선물해주기에도 부끄럽지 않은 실력이 되었다. 시간과 경험의 힘은 크다. 어떻게 하면 빠르게 그릴 수 있는지, 어울리는 색 조합은 무엇인지. 쌓인 경험들은 센스가 되어 재능처럼 빛나게 해준다.
만약 성급하게 미술학원에서 배웠다면? 과거의 나는 센스를 기를 시간도 없이, 빛나는 재능들과 비교하다 포기했을 것이다. 애매한 재능이 오히려 느긋하게 센스를 기르는 법을 알게 해주었다.
가공하기 전의 원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애매한 재능과 닮아있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원석이기 때문에 다듬고 가꿔주어야 한다. ‘나는 재능이 없다’ 말하는 친구가 있다면 누군가를 배려하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재능처럼 너에겐 너만 아는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