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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 프로젝트 Oct 07. 2017

진실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독을 가져오는지

기사단장 죽이기(1)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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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린 초상화가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스스로는 짚이는 데가 없었다. 대단한 열의를 담아 그렸다고도 할 수 없고, 그저 맡은 일을 하나하나 해치웠을 뿐이다. 솔직히 그동안 그린 이들의 얼굴이 지금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도 한때 화가를 지망한 사람이고, 어쨌거나 붓을 쥐고 캔버스 앞에 앉은 이상 어떤 부류의 그림이건 전혀 가치 없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한 나의 애정을 더럽힐뿐더러 스스로 택한 직업을 멸시하는 셈이다. 긍지를 품을 만한 작품은 못 될지언정 나 자신이 부끄러운 그림은 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쩌면 이런 것을 직업윤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그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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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저를 그리면 어떤 초상화가 완성될까. 저는 그걸 알고 싶어요. 바꿔 말해 제 호기심에 스스로 가격을 붙인 셈이죠."

"그리고 그 호기심에는 비싼 가격이 붙고요."

"호기심은 순수할수록 강력하고, 나름대로 돈이 들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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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누구나 인생에서 그렇게 대담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포인트가 찾아오면 재빨리 그 꼬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쳐서는 안돼요. 세상에는 그 포인트를 붙들 수 있는 사람과 붙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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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상상도 못했겠지요. 백몇십 년 후에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미술관까지 찾아가서, 혹은 화집을 펼쳐서 거기 그려진 자기 모습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리라고는요."

"왠지 묘한 기분이 드는군요. 그 자체로는 영속할 자격이 없던 무언가가 어떤 우연한 만남에 의해 결과적으로 그런 자격을 얻게 된다는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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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획도 목적도 없이, 내 안에 절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무작정 쫓아갔다. 마치 들판을 날아가는 희귀한 나비를 발밑도 보지 않고 쫓아가는 어린아이처럼, 한차례 색을 칠한 뒤 팔레트와 붓을 내려놓고 다시 2미터쯤 떨어진 스툴에 앉아 그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색이 맞다, 고 생각했다. 비에 젖은 잡목림이 만들어내는 녹색, 스스로를 향해 몇 번 작게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것은 내가 그림에 대해 매우 오랜만에 느낀 확신(비슷한 것)이었다. 그래, 이거다. 내가 원했던 색이다. 혹은 이 '골격' 자체가 원했던 색이다. 나는 그 색을 기조로 응용한 색을 몇 가지 더 만든 후, 그것들을 적당히 덧붙이며 전체적으로 변화를 주고 두께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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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 인생에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왕왕 있다는 말이죠. 그 경계선은 꼭 쉬지 않고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날 기분에 따라 멋대로 이동하는 국경선처럼요. 그 움직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자신이 지금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없어지니까요. 아까 제가 더이상 구덩이에 머무르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던 건 그런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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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정적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생각이 가고 다른 생각이 온다. 한 형상이 가고 다른 형상이 온다. 나 자신조차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조금씩 무너졌다가 재생된다. 무엇 하나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상실된다. 시간은 내 등뒤에서 조금씩 죽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진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앉아 시간이 죽어가는 소리에 마냥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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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고독을 가져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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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나 비유는 말로 설명할 것이 아니네. 그냥 이해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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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주에는 특별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단장도 나타나지 않았고, 연상의 유부녀 여자친구의 연락도 없었다. 무척 조용한 일주일이었다. 주위에서 가을이 조금씩 깊어갈 뿐이다. 눈에 띄게 높아진 하늘과 맑은 공기 속에서, 구름이 솔로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흰 선을 남기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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