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진을 보내준 수연도, 오렌지자스민을 돌봐주신 아버님께도 정말 감사하다. 수연의 집에 놀러 갈 때마다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부모님들. 아버님과는 많은 말을 나누진 못했지만 곁에 계시는 그 존재감 만으로도, 눈빛 만으로도 어쩐지 애정 어린 마음을 많이 받았었다. 컨디션은 좀 괜찮아지셨으려나.
처음부터 어딘가 비실비실했던 오렌지자스민이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꽃을 피웠다. 수연이 보는 나는 아마도 언제 부러지거나 시들어버릴지 모르는 나무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래도 그냥 날 믿고 지켜봐 달라는 말이 전부다.
수연은 내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가 나를 보는 시선을 그대로 내면화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응원할 수 없게 된다. 적어도 나는 나를 믿어줘야 하는데 수연의 눈으로 나를 보면 자꾸만 내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그게 너무 괴롭고 힘들다.그렇게 한계치에 다다르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최악의 상황인 거다.
수연은 수연 방식의 사랑이 있고, 나는 내 방식의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순간 서로에게 그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사랑이라는 것만큼은 사실일 거다. 그러다 어느 날에 딱 적당한 모양과 크기의 사랑이 만들어지면 꽃을 피우게 되는 게 아닐까.
우리는 많은 존재들의 도움을 받고 있나 보다.
완벽하게는 아니겠지만 수연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또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활자로 나누는 말에 어딘가 자꾸만 부딪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굴 보는 일이 수연에겐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같은 시공간에서 표정을 보고, 소리를 듣고, 상대방의 온도를 느끼는 건 글자보다 더 풍부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말의 질량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소통.
이것도 어쩌면 다른 성향 때문일 것 같다. 수연은 책과 많은 대화를 하고 나는 다른 감각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니까. 나에게 사랑은 함께 보내는 시간인 것 같다.
어제의 기도에서는 내 가슴에 새겨진 수연의 이름을 확인하고, 불러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느껴보려고 노력했다. 지금의 나는 작고 연약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언젠가 또 튼튼한 꽃나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계속해서 그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