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 운동은 페미니즘에 대해 막 알기 시작하던 때부터,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내가 코르셋을 아직 벗지 못했다는 사실은 늘 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죄책감으로 인해 내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해서 꼭 탈코르셋도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여성이 여성에게 기대되는 외모와 인상을 가지고 있을 때의 편리함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것을 잃을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단계적으로라도 반드시 탈코르셋을 실현하리라고 다짐하게 된 것은 일부 남성들이 왜 그토록 탈코르셋을 혐오하는지 이해하면서이다.
(일부) 남성들은 왜 탈코르셋 운동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머리를 자르겠다는 것이지, 그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겠다는 게 아니지 않은가? 왜 머리를 짧게 자르기만 하면, '너도 탈코르셋이냐?', '너도 페미니스트냐?'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비난을 하는 것일까? 더 이상 그들에게 선택받기 위해서 꾸미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분이 나쁜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김현경 작가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찾았다.
"1962년 미시시피 잭슨을 배경으로 인종차별과 싸우는 세 여성의 모습을 그린 소설 [헬프]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 이 소설에 나오는 흑인 가정부들은 오염된 존재로 취급된다. 남부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이지만, 버스에서 흑백 분리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그들의 일상은 여전히 짐 크로우 법의 지배 아래에 있다. 백인 가정에 일하러 가서도 언제나 뒷문으로 드나들어야 하고, 별도의 화장실을 써야 한다. 하지만 그들도 제복을 입으면 백인 전용 상점에 들어갈 수 있다. 제복은 종속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개의 목줄이 주인의 존재를 알리듯이, 흰 앞치마와 모자는 그들을 심부름 보낸 백인 고용주의 존재를 알린다. 그들이 독립적인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백인의 대리인으로서 와 있는 한, 다른 백인들을 그들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있다."
즉, 여성스러운 머리를 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곱게 분칠을 하고 있는 것은 ‘나는 사회가 나에게 부과한 2등 시민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고분고분하게 수행하고 있어’라는 메시지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탈코르셋 운동에 대한 남성들의 격한 반응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탈코르셋 운동의 의미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나는 숏 컷이 더 예쁜데, 그럼 긴 머리를 해야 하는 거야?", "나는 치마가 더 편한데 바지 말고 치마 입으면 안 돼?"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탈코르셋 운동의 본질은 편리한 옷차림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쁜지 않은 외형을 갖추자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탈코르셋 운동의 본질은 사회가 규정한 여성상을 탈피하자는 것이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상을 왜 탈피해야 하는가? 사회가 규정한 여성상은 단순히 어떤 옷을 입어라, 화장을 해라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회는 가정에서 애를 돌보는 것이 여성이 바람직하다고 규정하여, 여성들에게 동일한 직무의 남성에 비해 더 적은 월급을 주거나, 승진에서 누락시킨다. 사회는 성범죄의 원인을 피해자의 몸가짐과 정숙함에 돌리고, 피해자성을 강조하면서, 피해자들이 성범죄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가해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것을 방해한다. 사회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기가 센 여성이라고 라벨링 함으로써 우리가 묵묵히 이 모든 불합리를 견디게 한다.
탈코르셋 운동은 사회가 내게 부과한 의무와 불합리를 묵묵히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탈코르셋 운동은 일부 남성들의 과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