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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이 Oct 11. 2020

탈코르셋 3. 탈코르셋, 의무인가?

빨간약과 사회운동

 코르셋을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많은 페미니스트들에게 탈코르셋은 큰 고민거리일 것이다.  코르셋을 놓아야 한다는 것은 다들 인지하고 있지만, 평생 착용해온 코르셋을 한순간에 놓는다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여성에게 기대되는 외모와 인상을 가지고 있을 때의 편리함을 평생 동안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탈코르셋이 유쾌하지 않은 의무, 버거운 간섭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탈코르셋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억압을 주는 게 무슨 페미니즘 정신이야, 나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 거야", "여성에게 탈코르셋을 강요하는 것은 코르셋을 강요하는 것 이랑 똑같은 거야"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회를 바꾸려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유쾌하지 않은 과정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은 빨간 약을 먹는 것으로 비유되곤 한다. 이 비유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유래하였다. 빨간 약을 먹은 주인공은 그동안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삶은 거짓이며, 인공지능 컴퓨터가 인간들을 지배하고, 기계들이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인간들을 사용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음을 얻은 주인공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워졌다. 기계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이전의 편안한 삶을 그리워하던 조연 캐릭터 한 명은 주인공 일행을 배신하고, 악의 세력에게 협조하며, 그 대가로 세상의 진실을 모르던 때로 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빨간 약을 먹는다'라는 표현은 정말 페미니즘에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접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구조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대신 많은 의무와 고민, 번뇌를 짊어지게 되었다. 


  '페미니스트가 되었는데, 왜 삶이 예전보다 더 스트레스지?'


라는 질문은 '사회 운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이다. 거대한 사회 구조에 직면하고 싸우기를 결정한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더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탈코르셋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많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 가족, 친구, 남자 친구와 갈등을 겪을 것이다. 취업하는 과정에서, 이후 사회생활에서도 순응하고, 모른척하는 쉬운 길을 택한 사람들보다 더 고통을 겪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페미니스트들 중 일부는 훗날 그들이 걸어온 길과 정반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반페미니즘적 언행을 하게 된 원인이 지쳐서라고 생각한다.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훗날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는 과정과, 진보적이던 운동권 정치인이 누구보다 보수적인 정치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는 공통적으로 자신들이 추구해오던 이상이 결국엔 도달하지 않으리라는 절망이 존재한다.  그래서 지친 운동가들은 그들의 이상과 목표를 180도 수정하여 정반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동일한 대우를 받게 된다면, 더 이상 코르셋, 탈코르셋 담론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여성해방운동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장거리 달리기이다. 잘 싸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코르셋을 아직 벗지 못한 자매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너무 지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해봤는데, 성과도 없는 것 같네.'라는 생각에 싸우기를 포기하는 것을 막고 싶다. 여성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그리고 빨간약을 먹은 순간부터 이미 우리들의 삶은 전쟁터이며, 사회는 이미 수많은 잣대로 우리를 재단하고 공격한다. 그러니 나까지 더해 아직 코르셋을 벗지 못했다는 이유로 같은 페미니스트들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 모두가 천천히라도 코르셋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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