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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명명하기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by 김뭉탱


언어는 각 세계를 규정한다. 나방과 나비, 각각을 지칭하는 언어를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방-나비를 구분하지만, 빠삐용으로 나방과 나비를 통칭하는 프랑스인들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언어는 인식을 가르는 경계이며, 경계는 사회-문화에 의해 뾰족하게 혹은 둥글게도 주조될 수 있다.

날카로운 칼 끝을 연상시키는 낙태라는 단어. 그 날카로운 경계에 찔려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이내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낙태는 임신 중단으로 다시 명명된다.


비슷한 예로 우리는 정상인이라는 명칭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끼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정상과 비정상, 그런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다급할 때면 우리 스스로를 정상이라 다독인다. 정상인이라는 단어를 조금 더 부드럽게 다듬을 수 있을까.


이에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은 'the normate'라는 신조어를 제안한다. -ate는 '어떤 직무, 임무, 신분, 직위, 직능을 가진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따라서 normate는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차지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다. '정상'이라는 것이 지극히 사회적 경계로 구분 지어진다는 것을 가시화시켜 주는 이 단어는 언어가 가진 폭력성에 조금의 골무를 씌워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또한 언어의 경계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그리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위해 아름답고도 거부할 수 없는 선율을 내보인다.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글을 쓰는 것이 글쓰기의 의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자는 누구보다 그 일을 잘 해냈다.


그리고 예술이란 어쩌면, 명명되지 않은-혹은 고통스러운 무언가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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