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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구르르 Mar 28. 2023

경칩

우울한 마음에도 봄이 오나요

     우울과 공황으로 약을 먹기 시작한 것은 회사를 그만둔 직후였다. 회사에 다닐 때는 그렇게 고생해도 증상 하나 없더니 회사를 나오자마자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억울했다. 회사원이던 시절 주말과 공휴일에만 호되게 아프고 출근할 날이 돌아오면 말짱해지는 것과 패턴이 똑 닮아서, 다시 회사를 돌아가면 고쳐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컨디션에 따라 약을 적절히 증량하고 감량하며 증상을 조절하고 있었는데 추워지는 날씨와 함께, 얼어붙은 경기와 함께, 그에 따라 쪼그라들어가는 통장잔고와 함께, 나의 감정선도 곤두박질쳐버렸다.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수강생들이었다. 누군가는 이전에 비해 수업에 훨씬 힘을 덜 들이는 것 같아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기운이 없어 보인다며 염려의 말을 전했다. 훌라를 춘다고 늘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행복하고 밝기만 한 것이 알로하는 아니니 일주일간의 근황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덜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상황을 전했다. ‘매번 이 사람들을 데리고 와이키키에 다녀오시려면 힘드시겠어요.’  훌라는 아토피 빼고 다 고친다고, 우울증에도 특효약이라고 너스레를 떨던 이전과 다른 모습에 어떻게 반응할까에 대한 걱정을 지우는 말이었다.


    우울이 공감과 응원으로만 고쳐지는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강생들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질척이는 수렁에 빠진 몸을 도저히 빼낼 수 없었다. 반복되는 잘못된 결정으로 일상이 헝클어지고 관계가 삐그덕거리는 건 금방이었다. 내 우울함이 너무 커서 튀르키예에서 난 지진도, 그들을 돕기 위해 열린 바자회도 보이지 않았다. 글쓰기와 책 읽기가 될 리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보내던 뉴스레터는 비정기 발행으로 돌렸고, 때맞춰 마무리된 글쓰기 모임은 재신청하지 않았다. 고대 하와이 인들의 지혜가 담긴 마나 카드도 공부해야 하는데 책을 덮었다. 모든 것이 일시 중단되고 숨만 붙어있었다.


    트라린정 50mg의 효과가 나타난 것은 저녁에 약으로 먹고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일단 눈을 뜨자 느껴지는 개운함이 어색했다. 베개를 고쳐 베고 다시 눈을 감아도 말똥말똥 정신이 들었다. 지난 이 개월 동안 그랬듯 오전 내내 침대에 붙어 있으면 첫 번째 낮잠에 들어야 하는데 이상했다(지난겨울 하루에도 낮잠을 두, 세 번씩 잤다). 그래도 낮 12시인데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하자 수월하게 매트리스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어제 느끼던 어려움에 비해 너무 수월해서 어색할 정도였다. 잠옷을 외출복으로 갈아입는 동작도 중간에 소파에 앉거나 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일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다음엔 밖으로 나설 단계였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10분 거리가 1시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길을 걸을 땐 뺨에 닿는 봄바람이 느껴졌고, 커피를 마실 땐 커피의 맛이 느껴졌다. 친구를 만나자 친구의 이야기가 들렸다. 횡단보도에서 빨간불엔 기다리고 초록 불엔 길을 건너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손발을 닦고 세수하고 머리를 빗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 없이 하루를 온전히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숨통이 트였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와 함께 내 마음에도 길고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때마침 경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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