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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16. 2022

제주일기 06 힘들 땐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좋아

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4코스

병원에 다녀온 뒤로 꼬박 이틀이 지났다. 덜 움직이니 확실히 발목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기념으로 오늘은 4코스를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비가 온다던 예보와 다르게 하늘이 연한 하늘색으로 물들어 하늘에서도 봄내음이 가득했다. 발볼이 넓어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이젠 제법 타는 데 익숙해진 201번 버스를 타고 4코스의 시작 지점인 표선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3코스를 걸을 땐 발목과 물집 2단 콤보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표선의 해변을 걷는 것조차 지옥이었는데 오늘 다시 보니 파도도 잔잔하고 탁 트여서 참 예쁜 곳이라는 걸 느꼈다. 표선 해수욕장의 스탬프 간세를 찾아 4코스 시작 인증 사진을 찍고 걷기 시작했다.


아직은 발목이 불안정한 상태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4코스의 첫 부분은 휠체어도 다닐 수 있는 구간이 있고 그 구간이 생각보다 꽤 길게 되어 있어서 좋았다. 휠체어 구간이 약 5km 정도인데 이 길로 걷지 않으면 돌밭을 걸어 다녀야 해서 발목에 금방 무리가 올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무리하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4코스는 중간 스탬프가 있는 알토산 고팡까지 계속 해안가를 따라 걷는다. 


35년 만에 복원되었다는 바다 숲길인 '해병대 길'을 지날 때는 봄인데도 우거진 수풀 때문에 어두워서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제주 해녀들이 예전에 걸었다는 길, 이 길을 복원할 때 해병대 장병들이 도와주어 길 이름이 '해병대 길'이라는 걸 계속 떠올렸다. 누군가의 시간과 추억, 정성과 노력이 담긴 길이라고 생각하며 걸으니 숲 너머로 들리는 파도소리와 숲을 스쳐 지나는 바람소리까지도 잔잔한 배경 음악 같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발목 때문에 위기가 찾아왔다. 4코스 7km 부근을 걸을 즈음부터 발목이 미친 듯이 쑤시기 시작했다. 최대한 천천히 걷고 몇 걸음에 한 번씩 서서 발목을 풀어주는데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코스를 걷던 날처럼 절뚝이는 걸음으로 간신히 알토산 고팡 중간 스탬프가 있는 지점까지 왔다. 중간 스탬프가 있는 곳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쉬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 점심을 먹으며 몸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두툼한 문어가 올라간 해물 라면을 시켰는데 여기까지 오며 체력과 심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건지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았다. 사실 나 자신에게 실망해서 밥 먹을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남들 다 뚜벅뚜벅 잘만 걷는 올레길을 나는 왜 이렇게 더디게 걸을까. 이런 몸 상태도 그로 인해 별의별 나쁜 생각만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것도 싫었다.


그나마 수많은 생각 중에 '올레길이고 뭐고 그냥 접고 올라갈까?'라는 생각보단 '오늘만 날이냐, 내일 마저 걸으면 되지. 이번에 다 못 걸으면 다음에 또 오면 되지'라는 생각이 더 힘이 세서 다행이다. 하루에 한 코스는 꼭 걷는 게 목표였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목표만 쫓다가 영영 발목이 낫지 않게 되어 내가 좋아하는 등산마저 못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전진을 위한 후퇴라고 애써 나 자신을 위로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남은 하루 동안 푹 쉬면 발목도 쉬어준 하루만큼 더 나아져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 마음을 다지며.


자꾸만 아파서 우울한 내 마음처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




제주에 내려온 지 8일 차 아침이 밝았다. 오늘부터 약 3-4일간 비 소식이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밖을 바라봤는데 안개가 너무 심해서 멀리 보이던 바다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더 누워있어 보니 그래도 비는 안 오길래 오늘 마저 4코스를 걸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제 11km 정도 걸었으니 오늘은 8km만 걸으면 되니 발목에도 조금 덜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오늘의 목표는 빠르게 걷기가 아닌 적절한 시간에 꼭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것!


201번 버스를 타고 어제 마무리했던 신흥교차로에 내려 걷기를 시작했다. 생각보다 발목이 덜 아팠고 생각보다 날씨가 덜 우중충했다. 오히려 해가 없으니 선선해서 전날보다 훨씬 걷기도 좋았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평안한 길의 연속이었다. 약간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그래도 파도가 좀 치는 편이라 부스러지는 파도를 보며 걷는 맛이 있었다. 


약 20분 정도 천천히 걸으니 발목이 살짝 아파와서 해안가에 늘어진 돌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발목을 풀었다. 한 번도 같은 파도가 없는 바다를 보면서 '넌 참 다채로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다처럼 매일 매 순간을 다르게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단조로움을 최고의 평화라고 생각하는 나는 알 길이 없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조금 더 걸으니 그동안 본 하루방보다 조금 더 힙한 하루방을 만났다. 바로 노란 컵을 들고 있는 하루방! 맥심 cf를 찍었던 모카 다방이 있어서 노란 컵을 들고 있나 보다. 그리고 모카 다방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실까 하다가 그래도 밥부터 먹고 싶어서 모카 다방의 강아지를 열심히 만져주다 출발했다.


배가 한창 고플 때 도착한 식당은 들어가 보니 아쉽게도 예약제라고 쓰여있어서 조용히 돌아 나왔다. 그래도 조금만 더 걸으면 4코스 종료지점이 나오니 거기서 밥을 먹기로 했다. 다시 걸으며 카카오 맵으로 뭘 먹을지 찾아보니 남원포구에 돈가스 집이 보이길래 거기 가기로 결정! 3km 정도만 더 가면 됐던 터라 바다가 보이는 탁 트인 정자에서 5분 정도 쉬어주고 종료 지점까지 열심히 걸었다.


4코스를 걸으며 들었던 생각은 '너무 힘들면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란 것이다. 거의 20km에 달하는 긴 코스라서 처음에 겁부터 먹었고 거기에 발목이 아프다는 사실도 공포감 조성에 한몫했다. 중간에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불안정했지만 그럼에도 이틀에 걸쳐서 끝까지 걸을 수 있었던 건 '다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다음이 있다는 건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내가 도전할 준비가 된 순간에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다는 거니까. 물론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4코스는 '다음'이 주는 여유 덕분에 완주할 수 있었다.


세상 힙한 돌하루방과 귀여운 강아지, 이틀 동안 모은 4코스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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