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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17. 2022

제주일기 07 불행은 왜 몰아서 올까

꼬닥꼬닥 혼자 걷는 올레길 5코스

전날 미리 날씨를 확인했을 때 오후 1시부터 비 소식이 있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오후 3시에 비가 오는 걸로 밀려있었다. 역시 알 수 없는 섬의 날씨... 알 수 없는 만큼 또다시 비 오는 시간이 앞당겨질 수도 있으니 평소보다는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올레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가장 실감 날 때는 올레길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탈 때인데, 서귀포에서 성산까지 1시간 30분 걸려 다니던 게 일주일 만에 버스 타고 30분 이내로 도착할 정도로 시간이 줄었다. 점점 숙소와 가까워지는 시작점에 마음에도 조금씩 여유가 생긴다. 날씨는 이제 비는커녕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남원포구를 떠나 가장 처음 만나는 관광지인 큰엉을 향해 열심히 걸었다. 하늘은 푸른데 파도가 다른 날 보다 조금 거칠게 쳐서 파도 소리를 배경음 삼아 걸었다. 20분 정도 걸으니 큰엉 입구에 도착했다! 한반도 지형이 보이는 숲 사진을 찍는 곳으로 유명해서 그런지 입구엔 승용차 몇 대와 무려 관광버스가 와있었다. 제주 내려와서 관광버스가 오는 장소를 걷는 건 처음이라 혹시 사람 많은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한 대만 와있는 걸 감사히 여기며 숲길로 들어섰다. 무척이나 강렬한 햇빛을 쬐며 걸어왔던 앞 길과 다르게 숲길로 되어있어서 시원했다. 숲이지만 바로 옆은 절벽이라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옆에 리조트가 있어서 그런지 리조트 산책로처럼 엄청 잘 정비되어있어서 걱정을 한시름 덜었다. 애기들도 보이는 걸 보니 '아주 좋은 길이겠구나~' 하고 걸었다.


한반도 지형에 사람이 없길 바랐지만 관광버스를 본 이상 아예 없진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래서 다른 분들 사진 찍으시는 거 다 기다리고 나도 한 컷 찍었다. 이런 걸 발견해내는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평범한 길에서 특별한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의 눈썰미가 부러웠다. 그래도 너무 부러워하진 않았다. 그들이 찾은 곳을 공유해주어서 감사히 여기며 나도 그 장면을 즐길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한반도 지형과 그 옆에 위치한 금호리조트. 동화같은 구름이 어우러져 진짜 동화 속 세상 같았다.


한반도 지형 사진을 찍고 조금 더 걸어가니 갑자기 길이 아닌 길이 나왔다. 돌이 왕창 쌓인 곳이었는데 리본이 안 보여서 너무 당황했다. 분명 길이니까 여기로 나를 데려온 것일 텐데, 길이 아니라 돌밭이라뇨...? 철썩이는 파도를 보며 돌밭에 덩그러니 혼자만 서있는 풍경. 망망대해에 뚝 떨어진 것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벙쪘다. 조금 무섭지만 어쨌든 여기 길이 있으니 이리로 보낸 거겠거니 싶어 앞으로 이동하니 가려져 안보이던 리본이 보였다.


올레길에선 카카오 맵을 쓰는 것보다 올레길 이정표인 리본을 더 자주 찾게 된다. 이 길이 맞는지 아리송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리본 덕분에 길 잃을 걱정 없이 무사히 돌밭을 빠져나왔다. 어딘가로 날아가지 않게 꽉 묵어둔 리본에서 타인의 안전과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길인지 아닌지 모를 길들을 한두 차례 지나고 나니 사람과 차가 다니는 길이 나왔다. 혼자 다니다 보니 으슥한 숲길이 나오면 걸음이 빨라지다가 차도가 나오면 조금 안심하는 경향이 생겼다. 긴장이 풀렸는지 발목이 조금씩 삐걱이기 시작했다. 중간 스탬프 있는 곳에서 쉬어보자는 생각으로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노천 담수탕으로 사용했다는 태웃개를 지나 드디어 중간 스탬프가 있는 위미리 동백군락지에 입성! 스탬프 찍기 전에 와랑와랑이라는 작은 카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배가 약간 고파서 찰떡 구이와 감귤 스무디를 함께 주문했는데 찰떡 구이가 대접에 나와서 1차 당황, 먹어보니 너무 맛있어서 2차 당황. 위미리는 동백이 만개하는 겨울에나 와봤지 이렇게 따뜻한 날 오는 건 처음이었는데 오히려 동백이 저물고 난 지금이 조용하고 더 좋은 것 같았다. 바다는 안 봐도 되거나 산책 겸 걸어갈만한 거리에 있으면 괜찮은 사람, 그냥 조용히 며칠 푹 쉬고 싶다면 와랑와랑 맞은편에 있는 소이연가에서 며칠 묵어도 좋을 것 같았다.


길인지 모를 길과 꽤나 강렬한 경고 문구, 아직 남아있는 위미의 동백


비상이다, 카페에서 한참을 쉬고 났는데도 발목이 회복이 안됐다. 걸을 때마다 점점 더 욱신거리는 발목 때문에 걸음이 배로 느려졌다. 중간 스탬프를 이제 막 지났으니 못해도 2시간 이상은 걸어야 하는데 이대로 가면 최소 3시간은 잡고 걸어야 할 판이었다. 절뚝이며 한 걸음씩 걷다 보니 덜 아프고 싶은 나의 무의식으로 발목을 덜 쓰고 발가락으로 내 체중을 지탱하기 시작했다. 발목을 덜 움직이니까 그나마 걸음에 속도가 났다. 보이는 의자마다 앉아서 2-3분씩 쉬고 의자가 안 보이더라도 어디에 기대서라도 조금씩 발을 풀어주며 걸었다.


그마저도 이제 힘들 지경이 됐을 즘 지도를 켜서 확인해보니 종점 스탬프 간세까지는 걸어서 30분..! 지나오면서 실종자를 찾는 현수막을 보았는데 마침 내가 지나가야 하는 부근에서 실종이 되셨더라. 쉬면서 로드뷰로 미리 길을 좀 봤는데, 망장포를 통하는 길목이 으슥한 숲길이라 조금 겁이 났다. 낮에는 날씨가 좋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먹구름이 꽉 들어찬 하늘 때문에 더 무서웠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우회하고 싶어도 이 길이 유일한 통로인듯해서 나를 먼저 앞질러간 부부 올레꾼을 부지런히 쫓았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뒤에도 두 분이 오고 있는 걸 확인해서 그나마 안심이었다. 느리지만 분명한 한걸음을 모아 망장포 부근 숲길을 벗어났다. 이제 종료 스탬프 간세까지는 1km 남짓. 정말 끝이 다 왔다고 생각하니 발이 점점 아파왔다. 마음 같아선 물구나무로 걸어가고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까지 오르막과 돌길을 조금 지나 주니 종료지점이 나타났다. 제주에 내려온 이래로 가장 반가운 스탬프 간세였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아서 자축할 시간도 없이 서둘러 버스를 타러 갔다. 201번 버스를 타러 10분을 더 걸었다. 효돈에서 숙소까지는 15분이 걸렸다. 30분이 절반으로 줄었다니, 새삼 하루 사이에도 많이 걸었다는 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 양말을 벗어보니 생각도 못한 부위에 물집이 잡혔다. 새끼발가락은 아까 밖에서부터 어렴풋이 물집이 잡혔다는 걸 알았지만 두 번째 발가락 옆구리에 물집이...!!! 정말 난생처음 잡혀보는 물집이었다. 한 시간 정도 누워서 발의 붓기를 덜어주고 씻고 나와 발에 물집을 터뜨렸다. 발목이 괜찮았으면 이럴일도 없을 텐데.... 장애물을 만들어 걷는 스펙타클 올레길이다.


거기에 뭐가 문제인지(아마도 정형외과 약이 문제인 것 같지만) 피부 발진 때문에 온 몸이 가려운데 그중 특히 심각한 건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의 1.5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게 내가 한쪽 다리만 많이 써서 그런 건지 발진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 내일 일어나자마자 피부과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저녁이 되니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내일은 휴식!


낚시를 하는 분들이 많이 오시는 것 같은 망장포, 숲길 걷기 무서워 돌아가는 것도 찾아본 날..
날씨가 좋지 않아 더 무서웠던 망장포 옆 숲길과 우중충해 꼭 제주가 만들어진 날 같던 쇠소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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