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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18. 2022

제주일기 08 혼자 사는 건 처음이라

혼자일 때 아프면 더 슬퍼요

나는 지금 제주에 와있다. 올레길을 혼자 걷겠다며 덜컥 17일이나 여행을 가겠다고 선언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16박 동안 머물 숙소를 구해버렸다. 혼자 살아본 적이라고는 인턴 때 고시원 생활이 전부. 그것도 20일 남짓, 주말이면 꼬박 본가에 가서 자고는 했으니 이렇게 오래 타지에 나와있는 건 처음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혼자 처음으로 이렇게 오래 있어본 결과 느껴지는 첫 감정은 '외롭다'였다. 그간 네 가족 오순도순 살던 서울 집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볼 수 없었던 감정이다. 가족끼리 워낙 잘 뭉치는 타입이라 언제나 가족 중 2명 이상이 거실에 나와있기도 하고 또 누군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언제든 말할 상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혼자 살면 그런 게 없다. 왜 혼자 살면 혼잣말이 느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내 목소리를 까먹는다.


내가 이 먼 제주로 일을 하러 온 거라면 일터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 집이라는 공간이 안락한 휴식의 공간이 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나는 올레길을 걸으러 온 고독한 백수. 2일 차에 말을 걸어주신 올레꾼 분들이나 9일 차에 나에게 길을 물어본 올레꾼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제주에 내려와서 한 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oo메뉴 주문할게요 정도뿐이었을 것이다. 자발적 고독에도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이 따른다는 사실을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게 됐다.


두 번째로는 작은 소리에도 종종 놀란다. 영화는 어찌나 많이 본 건지 집에 들어올 때마다 각종 문이란 문은 다 열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처음 혼자서 잠을 청하던 날은 각종 끔찍한 상상을 다 해보다 잠이 들었다. (물론 너무 고된 하루였기에 악몽 따윈 없었다.) 고시원에서 살 때나 가족들과 함께 살 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있었다. 고시원은 혼자였지만 같은 층엔 여자뿐이라는 사실과 사람이 많이 사는 공간이고 회사 근처였던 만큼 등록할 때 고시원 사무실에서 언뜻 보았던 대기업 사원분들의 정보들이 위안이 됐다. 가족과 함께 일 때는.. 뭐가 무섭겠는가 혼자가 아닌데.


일주일 정도 살고 나니 이제는 이 공간이 방음이 싹 잘되는 편은 아니라서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는 무시해도 된다는 점과 같은 층에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된다. 그래도 아직 이중 잠금은 꼬박꼬박 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혼자 살 때 아프면 정말 서럽다는 점이다. 오늘이 벌써 제주에 내려온 지 10일 차다. 10일 만에 병원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처음엔 발목을 삐어서 정형외과에 다녀왔고, 오늘은 정형외과에서 지어다 먹은 약 때문인 것 같은 두드러기 때문에 피부과에 다녀왔다. 나흘이나 약을 먹었음에도 썩 좋아지지 않은 발목 때문에 속상한데 이제 피부도 내 편이 아니다. 절뚝이며 500m 떨어진 피부과에 가는데 괜스레 서러워졌다.


이 마음 어디에 표출할 수 없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데 왜 갑자기 울컥하는지 약간 목이 메었다. 어제 갔다 오지 왜 지금 가냐는 정겨운 타박에 '어젠 발이 더 아파서 못 갔다'라고 말하며 갑자기 밤부터 가려운 게 심해졌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두었다. 고작 열흘 떨어져 있었으면서 이렇게 부모님과 동생이 그리워지다니.. 심지어 동생까지 그리워지다니!! 나는 독립하기 힘들겠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독립의 의지를 꺾지 않은 이유가 있다. 우선 메뉴 선택권이 온전히 나의 것이다! 누군가를 배려하는 시간이 아닌 내가 먹고 싶은 걸 그때그때 먹을 수 있다. 여기가 온전한 내 집이었다면 마트에 가서 장을 봐다가 해 먹고 싶은 요리가 몇 개 있었는데 단기 숙소라서 배달 선택만 내 뜻대로 했다. 배달의 유혹보다 배달비가 크게 느껴지긴 하지만 갑자기 인생 최애 메뉴인 야채곱창 먹고 싶을 때 눈치 보는 것 없이 언제든 시켜먹을 수 있다는 최고의 장점..!


다음으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생긴다는 점이다. 본가에 살 때는 계속 방 밖에서 여러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에 깊은 집중을 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집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이 없진 않지만 혼자 살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계속 혼자 있게 된다.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볼 수도, 지금처럼 쓰고 싶었던 글을 쓸 수도, 아니면 그냥 깊은 사색을 하기에도 좋다. 외롭다는 감정을 조금 줄일 수 있다면 혼자 산다는 건 정말 내 저녁 시간을 온전히 나에게 쓸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혼자 살며 느꼈던 다섯 가지 중 나쁜 게 세 개나 되지만 난 이번 혼자 살기를 통해 오히려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아지트처럼 그냥 혼자 있고 싶을 때 가는 공간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간에 점점 오래 있게 되면 그게 독립이지 뭐.. 혼자 산다는 건 선택과 그에 대한 책임을 내가 다 져야 한다는 부담이 있겠지만 그만큼 자유도와 나에게 몰입할 시간이 생긴다는 거라, 독립.. 해보고 싶다!


- 캥거루족이 쓰는 일시 독립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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