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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21. 2022

제주일기 09 기쁘다 부모님 오셨네

꼬닥꼬닥 함께 걷는 올레길 9코스, 10-1코스

대평리에서 화순금모래해변까지, 그리고 가파도까지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발목에 이어 피부까지 말썽인 내 몸. 혼자 있어 두배로 아픈 기분이 들었는데 주말이라고 부모님이 내려오셨다. 드디어 함께 걸을 동지가 생긴 셈이다. 부모님께 어떤 올레길을 걷고 싶냐고 물었는데 내가 혼자 걷기 힘들 것 같은 곳을 같이 걸어준다고 했다. 그래서 냉큼 난이도 '상'인 9코스를 골랐다. 코스 중간에 꽤 높은 오름을 걷는 코스가 있어서 난이도가 높은 것 같았지만 엄마 아빠는 등산 고수니까 함께 걸으면 좋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한 가지 내가 놓친 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엄마 아빠가 아침형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여기 내려와서 제일 일찍 나선 게 9시-10시 정도였는데 엄마 아빠와 함께하니 아침 7시 반엔가 집을 나서게 됐다. 일어난 것도 아니고 집을 나선 시간이!!!! 7시 30분이다. 물론 9코스 시작점까지 가야 할 길이 멀어 일찍 나서긴 해야겠지만 이렇게 일찍 나서고 싶었던 건 아닌데 말입니다..ㅎ. 어쨌거나 간신히 뜬 눈으로 졸아가며 버스를 타고 난드르 마을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밥집이 없다는 정보를 읽어둔 터라 시작점 근처에서 아침부터 먹고 출발했다. 대평리 포구에서 시원하게 부서지는 파도와 박수기정 절벽을 보며 감탄하고 다 같이 9코스 시작 도장을 찍었다. 푸른 바다를 뒤로한 채 출발하자마자 마주한 몰질의 혹독한 돌길. 돌길에 은근한 오르 길로 이뤄진 몰질은 아침부터 사람 땀나게 만들었다. 그나마 위로가 됐던 건 부모님과 함께하는 길이라는 것과 날씨가 미친 듯이 좋아서 구름이 한 점도 없다는 것...? 오르막을 한참 걸어 올라가니 밭일을 하는 주민분들과 비닐하우스가 나타났다.


역시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는 부모님은 대번에 감자밭을 보며 여기는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다며 신기해하셨다. 철원에서는 얼마 전에 감자를 심었다며... 할아버지가 아빠가 심은 데만 싹이 안 났다며 뭐라고 했다는 대목에서 한참을 웃었다. 혼자 걸을 땐 밭 보면서, 풀 보면서 그저 와~ 신기하다 정도의 반응만 했는데 함께 걸으니 농사 얘기를 한다. 우리 집은 반쯤 농부 집안인 듯.


몰질의 끝에 나타난 너른 감자밭


엄마가 좋아하는 보라색 꽃들과 유채꽃을 한참이나 보며 걸었다. 중간에 야자수 밭도 보고(아빠는 왜인지 야자수를 보면 꼭 야채들이라고 한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광경, 차를 타고 다녔으면 오지 않을 곳을 누볐다. 느적느적 걷고 찍으며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9코스의 하이라이트인 군산오름 초입에 다다랐다. 전날 밤에 찾아보기로는 군산오름은 차로도 접근할 수 있다고 해서 길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큰 착각... 올레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코스에서 만났던 오름처럼 끝없는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오르막보다도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건 내가 걷는 올레길 옆으로 차가 지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꽤 높은 높이의 산인데 옆으로 차가 다니니까 괜히 심술이 났다.


그래도 군산오름을 오르며 좋았던 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인지라 그늘이 절실했는데 정상에 올라가기 전까지 그늘진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거였다. 왜 길이 끝이 없나.. 싶은 때 갑자기 산길이 끝나고 주차된 차와 오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정상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뜻 보이는 오름 아래 풍경에 벌써부터 정상의 모습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꽤 높이 올라온 건지 오름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그늘이 없었지만 시원한 바람 덕분에 덥지는 않았다.


예전에 감시초소처럼 쓰였다는 동굴들을 지나 드디어 군산오름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우뚝 서있는 중간 스탬프 간세를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오름 올라올 때 힘들었던 게 싹 사라졌다. 발아래로 펼쳐진 풍경도 피로 해소에 큰 도움이 됐다. 저 멀리 우리가 걷기 시작한 대평포구가 보였고, 그 너머의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뒤로는 한라산이 든든하게 감싸고 있었다. 날이 맑은 날 오지 않았다면 그 무엇도 볼 수 없었을 풍경. '개안'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정상에서 내려오다 미끄러지는 바람에 손목에 상처가 났지만 그런 쓰라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멋진 장관을 마주했다.


아빠는 왜 이 친구들을 야채라고 부를까?
앞으로는 한없이 넓은 바다가 뒤로는 한없이 높은 한라산이 보이는 군산오름


다시 올레길을 따라 오름 하산길에 나섰다. 내려오는 길이 무시무시한 내리막뿐이라 역방향으로 걸었으면 올라갈 때 정말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보통 산이라고 해도 정상으로 갈 때 오르막만 있는 게 아니라 가끔 내리막도 나오는데 하산길에는 정말 한 번도 내리막길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만큼 빠르게 내려갈 수 있었지만... 여길 올라가라고 하면 못 올라갈 것 같다. 마치 설악산의 오색 등산코스를 만난 기분이었다.


오름을 내려와 한숨 돌리고 만남 곳은 안덕계곡. 이 계곡물을 따라 걸어 바닷가 쪽으로 나가면 9코스도 끝이 난다. 부모님께도 이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종점 스탬프가 나올 거라고 금방이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이 계곡, 창고천이 이렇게 긴 줄은 나도 몰랐지..! 제주에 와서 바다가 아닌 계곡을 보며 걷다 보니 오히려 더 외국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걸으면서 대만 화련의 절벽이 생각난다고 하실 정도였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식물들과 화강암이 아닌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창고천의 돌들, 그리고 걷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절벽까지 외국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계곡을 따라 걸으면서 자꾸만 호빗들이 사는 동네가 이런 느낌이 아니었던가..? 싶었다.


어서와, 제주에서 계곡은 처음이지?


확실히 9코스의 난이도가 '상'이었던 게, 군산오름만 지나면 평탄한 길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질 않았다. 월라봉 옆으로 지나 화순금모래해변으로 가기 전에 작은 언덕을 한 번 더 지나야 한다. 말이 언덕이지 또다시 좁고 힘든 숲길을 걸어야 한다. 코스의 막바지에 다다른 만큼 체력도 바닥이 나서 군산오름보다 여기를 지나는 게 더 힘이 들었다.


누군가의 귤밭 옆 올레길을 따라 걸으며 도대체 겨울도 아닌데 열려있는 저 커다란 귤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대로 추리하며 걷다 보니 드디어 마지막 산길도 끝이 났다. 화순금모래해변까지 가는 아스팔트 길이 나온 것! 확실히 저 바닷가에 다다르면 올레길이 끝난다는 걸 아니까 부모님께 계속 '조금만 걸으면 끝난다'는 거짓말을 해서 키만큼이나 길어진 코가 조금은 줄어든 기분이었다.


화순리 마을길을 걷다가 만난 할아버지께 엄마가 9코스를 걷는 내내 계속 만난 귤의 정체에 대해 물어 우리는 드디어 그 친구가 뭔지 알게 됐다. 바로 여름에 먹는 하귤! 제주의 자몽이라고 불린다는 하귤이었다. 후련한 마음으로 마을을 벗어나 드디어 9코스 종료 지점에 도착했다. 11.8km라서 만만하게 봤는데 정말 극상으로 힘들었다. 부모님과 좀 덜 힘든 코스를 걸을걸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길을 혼자 걸었으면 내가 완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던 길이었다.


드디어 이름을 알아낸 하귤과 성큼 가까워진 삼방산!


하지만 우리에게 쉴 시간은 없다. 아빠가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가파도도 보고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해서 바로 카카오 택시를 불러 운진항으로 이동했다. 가파도 청보리가 워낙 유명하고 마침 또 우리가 청보리가 한창인 4월 어느 주말에 온 것이 잘못이었을까, 운진항에 들어서자 택시 기사님도 놀랄 정도로 많은 차가 보였다. 혹시 배를 못 타는 건 아닐까 싶어 서둘러 내려 매표소로 달렸다. 2시 30분에 표를 사러 갔지만 이미 앞 시간표는 다 매진이고 5시 반에 들어갔다가 7시에 나오는 표뿐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그냥 돌아가나, 우리는 까짓 거 3시간!! 기다리기로 했다.


카페에 앉아 4시까지 있다가, 매표소 옆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4시 반까지 있다가, 대기실에서 5시까지 있다가.. 30시간 같은 3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5시 30분 배를 타고 가파도로 이동! 반팔에 팔토시 낀 덕분에 추웠다는 것 빼고는 가파도 가는 길은 설렘 그 자체였다. 왜냐면 지금은 청보리밭 시즌이니까!


운진항에서 10분이면 도착하는 가파도, 바람이 거세면 아예 출항조차 하지 않기에 오늘의 날씨가 좋은 것에 감사했다. 저물어가는 태양과 함께 우리의 타임어택도 시작됐다. 7시 배를 타기 전에 올레길 스탬프를 찍어오는 것이 목표. 하지만 일단 청보리밭을 그냥 지나칠 순 없어서 이곳저곳 사진을 찍으면서 걸었더니 나중에 스탬프 찍을 시간이 모자랐다. 뛰다시피 걸어서 가파도 반대편의 스탬프를 찍고 돌아오는 길, 붉은 하늘이 함께 물들인 가파도의 풍경에 넋이 나갔다. 오히려 한낮에 오는 것보다 지금 이 시간에 온 게 너무 좋았다. 가파도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일출을 보고 싶을 정도로 멋진 풍경. 7시에 나와야 하는 게 아쉬웠다.


7시 배를 타고 나오기 위해 선실에 앉아있었는데, 배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 간다던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잠깐 배 뒤쪽으로 나오라기에 나가봤는데 배가 만들어내는 포말과 멀어지는 가파도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거기에 동쪽에서 떠오르는 커다랗고 붉은 보름달과 이제 막 출항하는 어선, 하늘을 누비는 패러글라이더까지 완벽한 마무리였다.


비록 운진항에서 다시 서귀포 시내로 돌아오는 데 1시간 30분이 걸려서 저녁을 9시가 다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지만 오늘 가파도까지 간 건 후회가 없었다. 평소 제주에 놀러 와서 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들, 맑은 날씨 덕분에 더 좋은 기억으로 남은 가파도까지! 혼자 걸었어도 좋았겠지만 부모님과 함께해서 더더더 좋았던 12일 차의 올레길. 부모님도 나처럼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여기가 천국일까?
아님 여기가 천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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