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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록 May 23. 2022

제주일기 10 다시 혼자가 됐다

꼬닥꼬닥 함께 걷는 올레길 6코스

오늘은 아쉽지만 부모님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시는 날이다. 서귀포에 잠깐 엉덩이만 댄 것 같은데 벌써 올라가는 날이라니. 다행히 저녁 비행기로 올라가시는 덕분에 그래도 함께 올레길을 하나 더 걸어볼 수 있게 됐다. 여유 있게 4시엔 출발해야 하기에 오늘은 난이도 '하'로 분류되어 있는 6코스를 걷기로 했다.


서귀포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용운사에서 하차해 시작 스탬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9일 차에 걸었던 5코스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미친 듯이 아픈 발목을 억지로 끌고 절뚝이며 왔던 이곳... 그리고 숙소 가는 버스 타러 10분이나 더 걸어야 했던 그날. 하지만 오늘은 발목도 괜찮고 무엇보다 혼자가 아니다! 외롭고 아플 일이 없다는 뜻. 거기에 날씨까지 미쳤다, 구름이 한 점도 안 보이는 미친 날씨다. 상쾌한 6코스 시작이었다.


쇠소깍에는 3월에 엄마 아빠와 함께 왔었는데 한 달 만에 다시 찾았다. 그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미처 몰랐는데 쇠소깍으로 걷는 길이 전부 다 엄청 멋있는 현무암 계곡이었다. 9시도 안 된 시간이었지만 쇠소깍에는 일찍부터 카약을 타는 분들과 테우를 타는 분들로 사람이 꽤 많았다. 생각해보니 제주에 내려와 주말에 걷는 게 이번 주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길에 사람이 많은 게 어제오늘이 처음이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곳을 걸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쇠소깍에서 카약을 타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멋진 절경을 놓치고 있었다니!


쇠소깍을 지나 하효 쇠소깍 해변을 지났다. 모래가 검은 탓에 생겨나는 포말이 잿빛인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왜인지 자꾸만 흑임자가 생각났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걸까? 마침 타이밍 좋게 아침을 먹고 가자는 아빠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아침부터 든든히 챙겨 먹었다. 먹고 난 이후에는 난이도 '하'인 올레길 답게 완만한 경사의 도로길을 걸었다. 다른 코스에 비해 유난히 야자수가 많이 보여서 더더욱 이국적이었다. 휠체어로도 이용 가능한 구간이라 그런지 정말 걷기가 편했다.


난이도는 낮지만 중간에 제지기 오름이라는 낮은 오름을 올라가는 구간이 있다. 이 구간은 휠체어 구간에 속해서 그냥 지나쳐도 괜찮지만 우리는 어김없이 '온 김에 가야지' 병에 걸려 오름을 올랐다. 높이로 따지면 100m가 안 되는 높이지만 생각보다 오르는 계단이 가팔라서 힘이 들었다. 오르는 중간에 잠깐 쉬었는데, 쉬면서 본 한라산이 장관이었다. 어제보다 날씨가 더 좋아서 한라산이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13분 만에 오른 오름의 정상은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아쉽게도 한라산을 볼 수는 없었지만 바다를 향해 설치된 망원경이 있어 바다를 구경하기는 좋았다. 오름 앞쪽에 있는 섶섬으로 오가는 배도 여러 대 있었다. 새파란 하늘과 더 새파란 바다를 보며 땀을 식히고 다시 오름을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이 오히려 완만해서 이 코스는 역방향도 괜찮겠다 싶었다.


제지기 오름에서 만난 산과 바다. 한라산이 꼭 모자 같다.


내려오고 난 이후부터는 계속 바닷가를 따라 걷는 길이 나왔다. 물론 중간중간 숲으로 들어가서 걷는 길도 많이 나왔지만 왼쪽에는 항상 바다가 보였다. 시내에서 가깝고 난이도가 낮아서 그런지 올레길을 걸으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여기 내려와서 걸었던 올레길 중에 사람이 가장 많았다. 아마 주말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보니 길목에 예쁜 카페들이 참 많았는데 아침 일찍 나왔는데도 부모님 출발시간이 약간 빠듯해 들르지 못한 게 아쉽다.  


길인지 아닌지 애매한 바닷가 돌길(날이 안 좋으면 파도에 휩쓸려 나갈 만한 길이라 우회로가 존재한다.)을 건너 2년 전 겨울 가족여행으로 방문했던 소천지도 만나고 칼호텔 옆 사람이 엄청 많은 핫플 카페도 지났다. 분명 올레길거리가 총 11km였는데 7km가 넘을 때까지도 중간 스탬프 찍는 곳이 안 나와서 지나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마다 카카오 맵으로 도장 위치를 확인하며 걸었는데 드디어! 소라의 성이라는 곳에 도착해 중간 스탬프를 만났다.


날이 안 좋으면 파도에 휩쓸려 나갈 것만 같은 길. 그래서인지 우회로가 존재한다.


중간 스탬프를 찍고 난 이후에는 쭈욱 시내 길을 걷는 코스라 서둘러 걷고 숙소로 돌아왔다. 중간에 이중섭 거리에 있는 이중섭 생가에 들러 작디작은 방을 본 것이 전부다. 어른 둘만 누워도 가득 찰 것 같은 작디작은 방 안에서 아이 둘까지 넷이서 살았다니. 그런데도 서귀포에서 살던 시대에 그린 그림이 가장 부드러운 그림들이라니. 참 묘했다. 지금은 집 크기도, 위치도 삶에 정말 중요한 요소인데 이중섭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서귀포의 삶이 얼마나 행복했던 걸까? 얼마나 행복했으면 그렇게 아름다운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놀멍 쉬멍 걸었더니 어느새 부모님께서 출발해야 할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다행히 6코스 종점 근처가 숙소여서 빠르게 도장을 찍고 늦은 점심을 먹은 뒤에 부모님은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시간 맞춰 서울로 떠나셨다. 칼같이 시간 맞춰 오는 급행버스를 타고 서울로 떠나버린 부모님,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됐다. 계속 혼자 있어서 어느 정도 혼자가 익숙해졌을 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버려서 어쩐지 조금 더 쓸쓸해졌다.


문득 작년부터 혼자 살게 되신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댁에 가서 못다 한 밭일도 하고 함께 밥도 먹으며 복작거리다가 모두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간 이후의 시골집에서 할아버지가 느끼셨을 감정도 이런 종류의 것일까? 나보다 더 큰 공간을 지켜야 하는 할아버지가 더 외로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외로움도 살림 앞에서는 장사 없다, 이제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러 가야지. 할아버지도 우리가 가고 나면 장비 정리와 집 정리로 정신이 없으셔서 외로울 작은 틈조차 없을 거라고 믿으며! (그래도 다시 혼자가 되니 밥맛이 똑 떨어져 저녁은 대충 마들렌 하나로 때웠다는 슬픈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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