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
밥. 가족을 구성하는 첫 번째 요소다.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이유다. 가족은 매일 식탁에서 만나고, 음식을 함께 먹는다. 도쿄 변두리의 허름한 집 한 채. 발 디딜 틈 없이 어수선한 집에서 이들은 늘 무언가를 먹는다. 주로는 인스턴트 컵 라면이나 가락국수(운 좋은 날은 크로켓도). 행복하진 않지만, 표정에는 어떤 불행도 없다. 매일 밥을 나눠 먹는 이들, 분명 가족이다.
돈. 가족을 구성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누군가 돈을 벌어야 가족 공동체가 유지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을 가장(家長)이라 부른다. 영화 속 가족에는 가장이 없다. 누구나 조금씩 생계에 기여한다.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아빠’,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 전 남편의 연금을 받는 ‘할머니’, 자신의 몸으로 돈을 버는 ‘딸’, 마트에서 가족의 생필품을 조달하는 ‘아들’. 누구나 일을 하고 돈을 번다. 이 가족에 새로 합류한 유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려 했던 이유는 하나다.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뭐든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가족을 가족으로 만드는 것들
섹스. 딸 아키는 어느 날 아빠 오사무에게 묻는다. 엄마랑 언제 하느냐고. 아빠는 말한다. 엄마랑 아빠는 가슴으로 이어진 사이라고. 그래서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아키는 웃는다. “거짓말.” 맞다. 거짓말이다. 천둥번개가 치고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날, 아빠 오사무와 엄마 노부요는 함께 국수를 먹는다. 처음 만났던 순간을 추억하고, 그들만 간직한 비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엄마 노부요의 등에 파가 묻었다.
호칭. 그리고 가족에겐 호칭이 있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엄마, 아빠다. 크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호칭이 있어야 가족이다. 아빠 오사무는 아들 쇼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 아빠라고 부르는 거다. 강요하진 않는다. 경찰관에게 심문을 받던 엄마는 막힘없이 당당하게 답한다. “우리는 할머니를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거”라고, “그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건 나”라고. 그런데 말문이 막힌다. 쇼타가 오사무에게 뭐라고 불렀냐는 경찰관의 질문에.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어느 가족>은 ‘가족이 무엇이냐’고 묻는 영화라고들 한다. 맞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왜 가족이 아니냐’고 묻는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걸어도 걸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왜 가족이 아닙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밥을 먹고, 너나없이 생계를 위해 일하고, 가끔 살을 섞는 이들이 가족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오히려 더 당당하다. "피로 이어지지 않아 좋은 건, 괜한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이야.“
동정하지 않는, 그래서 위로받는
감독이 따뜻한 시선으로 가족 영화를 주로 그린다고 한다. 잘못 본 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선은 전혀 따뜻하지 않다. 차갑고 냉정하며, 때로는 잔인하다. 피로 이어져 어쩔 수 없이 가족으로 불리는 공동체에 어떤 동정도 하지 않는다. 피로 이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가족처럼 사는 공동체에도 어떤 행운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기쁨도, 슬픔도, 때로는 처연한 죽음도, 그들이 견뎌내야 할 몫이다. 우리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며 위로를 받는 이유는 따뜻해서가 아니다. 차가워서다.
영화는 막바지로 향한다. ‘아빠’에서 ‘아저씨로 돌아갈 때다. 아이는 엄마에게 돌아갈 시간이다.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든 그들도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by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