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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Aug 05. 2018

그 여름 나의 코스모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코스모스>



절망까지는 아니었다. 단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불행하지도 않았다. 다만 행복하지 않았을 뿐이다. 절망과 희망이 없다는 것, 불행과 행복하지 않다는 것의 미세한 차이를 느낄 정도로 그때의 나는 민감했다. 


불안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어느 것 하나 선명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일감이 끊겨 그만둘 수도 그런 일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틴 지 어느덧 4년째다. 안심할 수 없지만, 이제 불안하진 않다. 안심과 불안하지 않은 것의 차이를 묻는다면, ‘그냥 다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불안 다음으로 다스려야 할 일은 분노였다. 배신감, 그건 의외로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배신감이 무서운 이유는 분노의 화살이 돌고 돌아 결국 나를 향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향한 분노는 상대나 상대를 잇는 매개가 사라지면 잦아들게 마련이다. 나를 향한 분노는 사정이 다르다. 내가 그 정도였느냐는 자괴감, 결국 이 모든 상황이 나 때문이라는 자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코스모스>는 1980년 책 출간과 함께 TV 다큐로 제작되었고 당시 7억 5,000만 명이 시청했다. <사진 출처=내셔널지오그래픽>


인간과 우주인문과 자연의 이야기


오해하진 마시라. 이 책이 불안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힐링서는 아니다. 세상을 탓하지 말고 나만 바뀌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주문을 거는 자기계발서는 더욱 아니다. 우주와 지구의 역사, 생명과 인류의 기원을 더듬는 대서사시다. 책 속의 과학 지식은 섣부른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역사와 철학은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靜觀) 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책을 덮으면 1장(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의 이 첫 줄을 다시 읽게 된다. 그렇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지’는 않더라도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칼 세이건이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막연하게라도 짐작하게 된다. <코스모스>를 번역한 홍승수 서울대 명예교수(이 책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게 된 비결의 5할은 번역자의 공이다)는 한 팟캐스트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결국 인간과 우주, 그리고 인문과 자연의 이야기였던 겁니다. 이것을 마음대로 넘나든 거예요. 세이건은 거작 <코스모스>를 저술함으로써 굳게 침묵하던 자연이 입을 열게 해서 스스로 자신의 속사정을 우리에게 들려주게 했던 것입니다. 참 멋져요. 그리하여 <코스모스>가 우주에서의 인류 문명의 현재와 미래를 묻는, 우리 삶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고전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습니다.”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결국 인간과 우주, 그리고 인문과 자연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로서의 과학서정적인 대서사


그동안 과학은 독백이었다. <코스모스>는 독백이 아니라 대화하자고 말을 거는, 스토리텔링으로 과학을 소개한 최초이자 최고의 책이다. 과학으로만 국한하자면 스토리 콘텐츠는 이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 세이건은 당대 최고의 사이언스 스토리텔러였던 셈이다. 누가 일본 사무라이의 얼굴을 닮은 헤이케 게의 등딱지로부터 생명의 자연도태와 적자생존, 다윈의 진화론을 설명할 생각을 했겠는가. 


그리고 역사는 서사였다. <코스모스>는 서사로서의 인류 역사를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비유와 문체로 소개한 역작이다. 누가 인류의 역사를 광활한 우주로부터, 한순간의 빅뱅으로부터 이야기할 생각을 했겠는가. 이렇게 서정적인 말로 시작하는 대서사를 만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인류는 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잠시 지구라 불리는 세계에 몸을 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원초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감히 그 기나긴 여정의 첫발을 내딛고자 하는 것이다.”  


우주 생명의 푸가(2장)를 듣고,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3장)를 음미하며,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5장)를 감상해보자. 여행자가 들려주는 이야기(6장)에 귀 기울이며 시간과 공간을 떠나는 여행(8장)을 떠나보자. 별들의 삶과 죽음(9장)을 목격하고 미래로 띄운 편지(11장)를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줄까?(13장)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와 소설 <콘텍트>의 저자이자 NASA의 여러 우주탐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사진 출처=내셔널지오그래픽>


보잘것없는 나를 받아들이게 한 책


그 시절, 손에 쥐고 있던 책이 <코스모스>였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진도는 더뎠다. 하루에 읽는 분량이 20~30쪽에 불과했고, 10쪽을 넘기지 못할 때도 많았다. <코스모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취했고 때론 집착했다. 


책을 다 읽었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창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마지막 남은 몇 페이지를 읽었다. 책을 덮고 고개를 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의 시작이었다. 문득 이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아니라 나를. 나이 먹어도 철들지 않았던, 이기지도 못하면서 싸움을 걸곤 했던, 그래서 늘 패했던 나를 용서하고 싶었다. 내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 보잘것없는 존재여도 된다는 사실을 조금은 인정하게 된 것이다. 


<코스모스>는 장엄하고 우아한 책이다. 그러면서도 만약 누군가에게 연애편지를 쓴다면 인용하고 싶은 문구로 가득하다. 첫 페이지부터 그렇다. 동료이자 부인이었던 앤 드류얀에게 이 책을 바친다며 세이건은 이렇게 적었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앤과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코스모스>와 공유할 수 있었음은,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by 책방아저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모스>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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