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기적 유전자>
"그들은 당신 안에도 내 안에도 있다. 그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이기도 하다. 자기 복제자는 기나긴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그들의 정체는? 유전자다.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제 그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계속 나아갈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다.” 이 문장은 책의 65쪽에 나온다. 대부분 이쯤에서 책을 덮는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것을 유전자 중심으로 보는 그의 시각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고백부터 하자. 세 번 정도 읽기에 실패했던 것 같다. 이유는 위와 같다. 계속 읽기 지쳐, 앞으로 읽을 일이 두려워, 뭔지 모르게 계속 불편해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그러면서까지 읽어야 하냐는 반문이 마음속에 일었다(재밌고 쉬운 다른 책도 많은데).
어떤 책이든 완독은 어느 정도 이런 의지와 끈기가 필요하다. 어떤 책이든 100쪽까지는 버텨야 한다. 술술 읽히는 소설도 100쪽을 넘기기 전까지는 안심하면 안 된다. 그때까지 완독 할 가능성은 반반이다. 아무리 두텁고 어려운 전문서적도 100쪽을 넘기면 안심해도 된다. 완독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완독이 어렵거나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 끝내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독서의 습성이 있다면 이 방법을 권한다. 무조건 100쪽 넘기기. 사족이었다.
◇ 불멸의 유전자, 혹은 협력적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유전자가 미리 프로그래밍한 대로 먹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가 출간되자 곧바로 심각한 반박과 반론, 항의에 부딪힌다. 호평과 혹평이 교차했다. 역설적으로 그런 논란은 도킨스와 이 책을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었다. 다소 과장이 섞였지만, 옮긴이는 책머리에 이렇게 썼다.
“1976년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되면서 지식 사회에 까친 영향은 마치 1859년에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했던 때와 흡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1976년에 다시 등장은 다윈은 <종의 기원>을 쓴 50세의 다윈이 아니라 35세에 <이기적 유전자>를 들고 나타난 도킨스였다.”
도킨스 스스로 인정했듯 책 제목도 그런 논란과 반향에 한몫했다. ‘이기적(Selfish)’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이고 다소 침울하다. 런던의 한 출판사 관계자는 도킨스에게 오히려 ‘불멸의 유전자(The Immortal Gene)’가 책의 주제와도 부합하고 역동적이지 않느냐고 권했단다. 책 주제와 부합하는 또 다른 제목으로는 ‘협력적 유전자(The Cooperative Gene)’가 있다. 어찌 됐든 제목은 <이기적 유전자>로 정해졌다.
왜 ‘이기적’ 유전자일까? 유전자가 이기적인 이유는 언제나 이기적인 유전자가 후손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본질은 자기 복제다. 복제에 유리한 유전자는 그렇지 않은 유전자보다 강하고 오래 살아남는다. 결국 이기적이라는 뜻은 자기 복제에 유리한 특성을 지녔다는 의미다. 정리하면 이렇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를 한다. 또 유전자는 자기 복제에 유리한 특성을 보인다. 정말 ‘이기적’인 유전자다.
◇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
다만 ‘이기적’이라는 뜻을 ‘불멸의’, 혹은 ‘협력적’ 유전자로 이해해도 이 책을 읽는 데 불편함이 없다. 때로는 ‘이타적’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생명체의 이타적 행위조차 자기 복제를 더 유리하게 하려는 이기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사례가 필요하다. 도킨스는 숱한 사례를 제시한다. 벌도 그중의 하나다.
일벌이 침을 쏘는 행위는 꿀을 훔치려는 도둑이나 적을 퇴치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다. 하지만 일벌이 침을 쏘는 행위는 자살과도 같다. 폭탄을 가득 싣고 적 함선에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다. 침을 쏘는 동시에 벌의 내장도 함께 나온다. 이러한 벌의 자살 행위가 집단 생존에 필요한 먹이를 지켜 냈을지 몰라도 일벌 자신은 죽게 된다. 이것은 명백한 이타적인 행동이다.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이전까지는 집단 전체의 생존에 주목하며 개체들의 이타적 행동이 집단 전체의 생존력을 높여준다는 설명이 지배적이었다. 이른바 ‘집단 선택설’이다. 허술한 측면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동의했다. 나의 희생을 뭔가 가치 있는 행동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부모, 다른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동료 개체는 생각만 해도 뿌듯하다.
도킨스는 이런 뿌듯함에 찬물을 끼얹는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천만에. 그냥 유전자가 그렇게 생겨 먹었고,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게 도킨스의 설명이다.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 그 기계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을 창조한 주인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뿐이다.
자기와 비슷한 유전자를 조금이라도 많이 지닌 생명체를 도와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려는 행동은 결국 이러한 이기적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돕는 이타적 행동도 결국은 자신과 같은, 혹은 닮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책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이해할 만도 하다).
◇ “한 번도 읽기 어렵지만 한 번은 읽어야”
“40억 년 전 스스로 복제본 사본을 만드는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다. 그 복제자는 절멸하지 않고 생존 기술의 명수가 됐다. 복제자는 오래전에 자유롭게 뽐내고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복제자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 지어서 로봇 안에 안전하게 들어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으며, 그것을 보존하는 것만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다.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도킨스는 이처럼 철저한 다윈주의 진화론과 자연선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기존의 진화 단위인 ‘개체’를 불멸의 존재인 ‘유전자’로 대치했다. 이 책이 그토록 격렬한 반향을 일으키며 현대판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유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 책과 도킨스의 주장이 그토록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생명체에만 적용한 것이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을 모두 포괄하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의 영역을 문화적 영역으로 확장한 ‘밈(Meme)’ 이론이 대표적이다. 유전적 진화의 단위가 유전자라면, 문화적 진화의 단위가 바로 밈이다. 생명체가 유전자의 자기 복제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는 것처럼 밈도 자기 복제를 통해 전파하고 진화한다.
도킨스는 1976년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마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상과학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라 과학서다. 우리는 생존 기계다. 즉, 우리는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들이다.”
글쎄다. 이 책을 공상과학 소설처럼 읽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적절성 여부를 떠나 그렇게 읽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이 책을 사회과학 서적으로 읽었다. 사회적 관계망에서의 인간이 어떻게 생존하고 진화했는지를 이런 과학적 통찰력으로 분석한 책은 드물다. 누군가 <이기적 유전자>를 이렇게 소개했다. “한번 읽기도 어렵다. 하지만 한 번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내 생각도 그렇다.
by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