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가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 <떨림과 울림>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 우리는 다른 이의 떨림에 울림으로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이 문장에 반했다. 주저 없이 책을 골랐고, 그날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 권의 책을 선택하는 데 많은 문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 문장, 어쩌면 한 단어로도 족하다.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읽고 난 뒤 모든 문장이 남는 것은 아니다. (대게는) 한 장면, 한 문장, 심지어 한 단어만 남기도 한다. 그러면 된 거다.
“그에게 물리를 배웠다면”
물론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책이었기 때문에 쉽게 마음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안다. ‘알쓸신잡 시즌3’에 출연하기 이전부터 그는 과학을, 물리학을 가장 쉽게 설명하는 국내 과학자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을. <김상욱의 과학공부>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물리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상욱의 양자공부>를 읽으며 이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눈치챘다.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과학이, 물리학이 이렇게 나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오해하진 마시라. 난해하고도 심오한 물리법칙과 그 법칙을 설명하는 무수한 수학 공식을 이해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김상욱에게 배웠다면 물리를 다정하게 대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김상욱 교수처럼 과학과 물리학을 쉽고 아름답게 설명하는 과학자는 없다. 그의 책을 읽으면 차갑고 딱딱한 물리학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는 착각이 들게 한다). 인문학적 감수성에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때문이다.
나는 깨달았다. 진정한 과학자는 절대 보수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진보주의자(때로는 급진주의자)가 아닌 이상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이 돈다는 전복적 사고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입자인 전자가 파동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가 물리학을 보는 시선은 늘 따뜻하지만, 이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항상 날카롭다.
우주의 근본적인 현상, 떨림
그의 말처럼 물리는 차갑다. “물리는 지구가 돈다는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이보다 경험에 어긋나는 사실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구는 돌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주의 본직을 보려면 인간의 모든 상식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물리는 처음부터 인간을 배제한다.”
하지만 그는 물리학이 인간적으로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고 말한다. “인문학의 느낌으로 물리를 이야기해보려고 했다. 나는 물리학자다. 아무리 이런 노력을 했어도 한계는 뚜렷하다. 그래도 진심은 전해지리라 믿는다.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며 느꼈던 설렘이 다른 이들에게 떨림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울림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왜 떨림과 울림인가? 그에 따르면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물리현상 가운데 하나는 진동이다. 존재하는(엄밀히 말하면 정지해 있는) 모든 것은 떨고 있다. 빛도, 소리도 떨림이다. 물리학적으로 보자면 빛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시공간에서 진동한다. 빛은 진동수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소리는 공기의 떨림이다. 진동수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떨고 있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책상, 그 위에 놓인 커피잔도 그렇다. 놀라지 마시라. 우주도 떨. 고. 있. 다.
실제로 있는 것은 진공과 원자뿐
결국 진동의 본질을 파악하면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 진동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모든 사물과 현상을 수학 공식으로 풀어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떨림과 울림의 현상을 기반으로 빛, 시간과 공간, 원자, 전자, 카오스, 엔트로피, 양자역학 등 물리의 핵심 개념을 하나씩 정복해 나간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삶), 어디고 가고 있으며(죽음), 나와 타자와의 관계(세계)로까지 범위를 넓혀 간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알았다. 데모크리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관습에 의해 달고, 관습에 의해 쓰며, 관습에 의해 뜨겁고, 관습에 의해 차갑다. 색깔 역시 관습에 의한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은 원자와 진공뿐이다.” 이 세상은 텅 빈 진공과 그 속을 떠도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나머지는? 관습, 즉 인간의 주관적 산물에 불과하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도 원자로 설명된다.
“우리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에 있는 탄소 원자 하나는 먼 옛날 우주 어느 별 내부의 핵융합 반응에서 만들어졌다. 그 탄소는 우주를 떠돌다가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 내려앉아, 시아노박테리아, 이산화탄소, 삼엽충, 트리케라톱스, 원시 고래, 사과를 거쳐 내 몸에 들어와 포도당의 일부로 몸속을 떠돌다, 손가락에 난 상처를 메우려 DNA의 정보를 단백질로 만드는 과정에서 피부 세포의 일부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떨림과 울림의 관계가 아니라면?
용기 내서 만든 회사를 지난해 말 더 큰 용기로 접었다. 사실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시작은 누군가의 작은 의심과 오해였던 것 같다. 의심하더니 혼자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런 결론이 인정받지 못하자 시시때때로 폭발했다. 폭발의 주기가 짧아졌다. 그것을 내가 참고 견딜 이유는 없었다. 그는 분노로 떨었지만, 나에겐 어떤 울림도 없었다.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관계였던 모양이다.
상대가 그렇게 부르르 떨고 있을 무렵, 미안하게도 내 손에는 <떨림과 울림>이 들려 있었다. 책을 읽으며, 현실의 일을 겪으며, 떨림과 울림의 상호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관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문득 ‘책도 그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떨림과 울림으로서의 독서. 그렇다면 내가 한눈에 반했던 문장을 이렇게 바꿔도 좋을 것 같다.
“인간은 울림이다. 우리는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의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한다. (…) 우리는 책의 떨림에 울림에 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나의 울림이 또 다른 떨림이 되어 새로운 책의 울림으로 보답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인간은, 그리고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울림이고 떨림이다.”
by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