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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Mar 28. 2019

침묵의 봄

듣고[聽 보는[見] 계절에 관한 단상



누군가 말했다.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라고. 어원은 잘 모르겠으나 두 단어에 관한 이렇게 명징한 설명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 그림과 그리움이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었다니 놀랍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그림이 될까? 또 누군가는 이렇게 노래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 전문)” 


시인이 언제 이 시를 썼는지 알 수 없으나, 봄에 쓰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봄의 어원에 관한 여러 학설 가운데 ‘보다[見]’에서 왔다는 견해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대로 상상해본다. 어느 봄날, 시인은 얼음이 녹고 꽃망울이 피고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해마다 봤던 흔한 장면이지만, 유난히 예쁘고 사랑스럽다. 달라진 건 없다. 그저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렇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이렇게 묻는다.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사진 출처=pixabay>


누군가에게 봄은 보는[見] 계절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듣는[聽] 계절이었던 모양이다. 봄이면 당연히 들려야 할 소리가 있다. 어느 날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적는다.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새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런 상황에 놀란 마을 사람들은 자취를 감춘 새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새들이 모이를 쪼아 먹던 뒷마당은 버림받은 듯 쓸쓸했다. 죽은 듯 고요한 봄이 온 것이다.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중에서)” 


1958년 1월, 레이첼 카슨은 매사추세츠에 사는 친구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정부가 모기 퇴치를 위해 DDT를 살포했는데, 그 후 자신이 기르던 새들이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카슨은 살충제 사용의 실태와 위험성을 알리기로 마음먹고 <뉴요커>에 연재를 시작한다. 친구의 편지를 받은 지 4년이 지난 1962년 마침내 책이 출간됐다. 20세기 환경정책과 환경과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책이라는 평가를 받는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은 그렇게 탄생했다. 


책에서 카슨은 이렇게 묻는다. “수많은 마을에서 왜 활기 넘치는 봄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까?” 언젠가 우리는 이렇게 묻게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도시에서 왜 형형색색의 봄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까?” 미세먼지에 황사까지, 올봄에도 꽃소식만큼이나 대기오염 소식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새삼 깨닫는다. 봄은 보는[見] 계절이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어떤 시도와 노력이든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끄러운 봄, 형형색색의 봄을 위하여.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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