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2
"나랑 일 하나 하자"
영화 신세계에서 최민식이 이정재에게 했던 말이다. 이정재는 영화에서 여수 출신 화교로 나온다. 영화 막바지에 이 대사가 나오는 이유는 최민식이 이정재를 선택한 게 그의 출신 성분 때문이라는 걸 관객들에게 밝히기 위해서다. 최민식은 비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쉽게 사용하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중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의도하지는 않았을 지 몰라도, P팀장도 그런 이유로 나를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시골 출신 없는 집안에 L전자 경력직 연구원. 우리 회사는 당초 50여명의 모회사 인원에 그룹사 전출인원과 경력직 인원들로 규모가 커진 회사다. 그래서인지 출신 회사에 따른 차별이 공공연히 이뤄져 왔다. 인도 카스트 제도에 빗대면 모회사와 그룹사 인원은 브라만 계급, 나같은 S전자도 아닌 L전자 연구원은 수드라 계급 정도 될 것 같다. 50명의 작은 회사에 다니던 P는 갑자기 대기업의 팀장이 되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대기업의 팀장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 너네 팀장 앞으로 높이 올라갈 사람이야. 네가 맘대로 상대할 사람이 아니야. 잠자코 있다 가는 거야. 알았어?
2018년에 새롭게 나의 그룹장이 된 P의 꼬붕이 나를 불러 조용히 있다 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회사 내에서 높이 올라가 봤자 그 끝은 월급쟁이 사장이지, 어차피 회사 밖에서 만나면 동네 아저씨일 뿐이지 않는가. 무엇이 두려워서 그에게 저렇게나 충성할까. 나의 그룹장은 타 팀에서 팀장 경쟁에서 밀려, P팀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우리 팀으로 전배 온 케이스다.
- 넓게 넓게 보세요. 회사가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나중에 제게 이렇게 협박한 사실에 대해 부끄러워 해야 할 날이 올 꺼예요.
라고 말하고 난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그는 항상 P의 지령을 받고 움직였고 나는 나의 뜻이 그의 입을 빌려 P에게 전달되길 바랬다. P가 조바심이 난 이유는 내가 실장님방에 들어가 팀을 옮기고 싶다고 면담을 했고, 그간 P가 팀을 운영했던 방법, 나에게 했던 강압과 폭력, 그리고 최근 제기되는 회사 이슈를 재경과 영업과 짜고 숨긴 사실까지 낱낱이 밝혔기 때문이다. P는 내가 그들이 숨긴 이슈를 더 밖으로 공론화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2. 2013년엔 사업계획 업무로 13주 연속 주말 출근 기록을 세웠다. 주말 근무도 주말 근무지만, 주중엔 밤12시 경에 퇴근하여 사비로 택시 타고 집에 가기 일쑤였다. (회사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들은 서울가려고 하지 분당은 대개 승차거부한다.) P는 다른 팀원이 야근할 땐 택시비를 팀비로 청구하라고 이야기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나에겐 왜 말안했냐 젠장. 난 그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잖아. 뭐 좋다, 거기까진.
어느 날 하루 쉬고 있던 일요일 새벽 6시에 화니 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너네 집 밖이니 당장 튀어 오라고. 영문을 몰라 무슨 일이예요? 물으니 P팀장이 나를 데리고 오랬단다. 화니 과장은 결국 나를 데리고 기술 전시회장에 와서 전시물 셋팅 작업을 시켰다. 전시회장에 오니 윤선생과 P팀장이 있었다. P팀장은 토요일 밤 12시까지 일한 사람을, 일요일 새벽에 화니 과장을 통해 나를 또 데리러와서, 굳이 다른 사람 업무까지 지원하게끔 시킨 것이다. (얘 나 좋아하니? 왜 365일 날 보고 싶어해)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런 지원 업무에 국회의원 조카, 산부인과 의사 딸, 강남 8학군 출신 들은 모두 제외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결국 그 날 새벽에 불려나가 당시 기획실장인 윤선생에게 진상짓과 짜증을 부린 나머지 날이 바뀐 월요일 새벽 2시에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난 분당 옥탑방 집에 와서 뭔지 모를 서운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쏟았고 어떻게 잠이 든 지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4시간 자고 일어나 황급히 월요일 출근을 준비했다. 당시 힘들었던 건 일이 많은 것보다 대놓고 차별을 받는 것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그리고 P팀장과 화니 과장뿐 아니라 매정한 팀원들도 모두 미웠다. 나는 그때 입에 걸레를 문 듯 입밖으로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