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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은 삶도 있다.

에피소드#3

by 꼬르따도

- 회사 생활은 다 그래.

- 인생은 다 그렇더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힘겹게 꺼낸 회사 생활의 고충을 자신의 짧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조적인 충고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굳이 꼰대라고 명명하지 않더라도) 자기 딴에는 진실된 조언이지만 듣고 나면 힘이 빠지는 얘기들. 사실 조심한다쳐도 나도 가끔 '옛날에 말이야~'로 시작하는 구전전설 같은 회사 초창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서는 뒤늦게 나의 꼰대스러움에 놀랐던 적이 있다. 어쩌면 인간은 40이 넘어가면 발현되는 꼰대 DNA를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


P팀장이 내게 했던 가혹행위들을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편하게 지내는 부장님께 말했다. 아니, 간혹 감정이 올라와 미친 새끼 같은 걸러지지 않은 용어들도 사용했던 듯 하다. 잠잠히 듣던 부장님은 '그 사람 니가 어떻게 해 볼 사람이 아니야.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라고 말했다.


- 그니까 대체 그 믿는 구석이 뭘까요?


이 조그마한 회사에 대체 믿는 구석이 뭘까. 언젠가 P팀장이 나를 불러 성과 면담을 하는데 다른 사람은 다 자기를 믿고 따라 오는데 너도 그럴 수 없느냐고 물었다. 자기가 세상을 살아보니 라인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면서. 그렇다면 나에게 안 좋은 평가를 주었던 이유가 자기를 따르지 않아서란 말인가.


나는 너처럼 정치적이고 여자 밝히고 사람들 차별하는 개쓰레기는 본 적이 없는데 뭘 믿고 널 따르냐, 라는 말을 속으로 꿀꺽 삼켰다.


뒤늦게 그 믿는 구석이 본사의 모 임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P팀장이 감사에 걸렸을 때 아무 도움을 주지 않았던 인물이다. P팀장은 마지막까지 그의 도움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P팀장을 애끼는 오야붕룸싸롱 패밀리도 곧 본사 그 임원이 헬기 타고 짠 나타나 동앗줄로 P팀장을 뿅 구제해 주리라 믿었다. 서로 다들 괜찮아, 아무 일 없을꺼야, 다독이는 동안 아무일은 척척 진행되어 어느 날 P팀장의 책상을 빼라는 인사팀의 공고가 갑자기 날아들었다.


#에피소드3


이번 에피소드를 쓰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꺼내는 건 썩 즐거운 일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주하게 된 기억에 설명할 수 없는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일은 굳이 기억을 떠올려 활자로 옮기는 대신 당시 내가 썼던 일기로 대신한다. P팀장이 물론 의도한 상황은 아니지만 가끔은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오늘 결혼식장 최고의 메뉴는 생맥주였고, 연거푸 세잔을 먹었더니 "서장로님 아들입니다." 라고 말하기 민망해 혼주분에게 인사도 없이 축의금만 내고 자리를 떴다.


자리를 일어서다 영은이네 어머니를 만나 인사를 했다.

작년 경황이 없는 너네 어머니에게 김장 김치를 전했더니 고마워하더라,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김장김치도 못담글 만큼 엄마는 경황이 없으셨구나.


사당역에서 우연히 기 수석님네 가족을 만났는데 영어가 짧아 인사를 못나눠 아쉬웠다. 기수석님 아들은 미남이었다!


문득,

우리는 하나의 점이고ㅡ 점이 모여 선이되고 선이모여 면이되고 면이모여 공간, 우주가 된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고ㅡ


볕도 좋은데 집에 돌아가 빨래나 하자,싶다가 현구에게 전화해 쇼핑하자로 일정을 바꾸었다.


볕은 금방 사그러들고 연휴는 후딱 지나가고 좋은 계절은 짧고, 그래서 함께 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ㅡ


너에게

사랑해,라고 카톡을 보내는데 한강에 반사되는 햇살탓인지 눈이 시렸다.


연거푸 마신 생맥 탓이 크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 기쁨과 즐거움의 총량을 인구수로 엔빵하여 골고루 나누어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사람들에게만 감정의 극단이 편중되지 않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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