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EX 해 버렸어,
웃기지마 여긴 대한민국이야.
어제 22개월 딸아이와 자연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러시아 캄차카 지역에서 사는 불곰이 오호츠크해를 지나 아무르강 연안으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냥하는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불곰의 발톱에 연어의 살갗이 벗겨져 빨간 속살이 여과없이 드러났다.
- 저거 너무 잔인하지 않아? 우리 다현이가 봐도 될까?
- 아니 약육강식의 세계인걸. 자연이잖아.
미생을 인생 드라마라 칭하며, 본인이 그 드라마 속 이성민인 줄 알았던 P팀장이 자주 하던 말이 있다.
'회사 밖은 지옥이야.'
나에겐 회사가 지옥이었다. 사람이 힘든 이유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비교로 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함께 밤을 새서 동료들과 급한 프로젝트를 완료하는 건 보람찬 일이다. 추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가한 팀에서 누군가 혼자에게만 빡센 프로젝트의 부담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지옥이다.
P팀장이 말했다. 회사 생활은 경쟁의 연속이고, 그 경쟁에서 이기는 걸 두려워해선 안된다고. 회사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친목 도모의 장이나 서로의 취미나 연애사나 나누는 동호회가 아니라고.
그는 여러모로 잔인했다.
특히 내게 더 잔인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내가 뭐 특별히 그에게 잘 못 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었다. (어쩌면 그가 군대에서 전라도 출신 선임에게 된통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당시 우리 팀에서 내가 제일 만만한 건 사실이었다. 시골 출신에 L모 전자 경력.
적당히 일도 잘했고 말도 잘 들었고, 여러모로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다.
팀 내 주위를 둘러보면, 유명 국회의원 자제와 고급 외제차를 모는 산부인과 원장 딸이 있었다.
회사에서 살아남는 것은 실력이 아니라, 그가 가진 배경이다. 없으면 아부라도 해서 잘나가는 라인에 붙어야 한다. 오야붕룸싸롱클럽라인들은 사회생활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잘 알았다.
여러가지 회사 채용 기준을 통과하여 회사에 입사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거기서 거기다. 그 평균의 인력 풀에서 살아남는 건 '니 아부지 뭐하시노'의 대답의 결과이다. 씁쓸하지만 회사 생활은 그런 것이다. 회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찍이 그걸 깨달았다.
결국 인정해야 한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하는 것을.
실장님과 최근 면담할 때 성과 목표 양식 귀퉁이에, 개인 5개년 성장 계획으로 이렇게 적었다.
1. 사내외 인적 네트워크 강화
1) 고교동창 청와대 OO수석 비서실장 후원회 회장
2) 고향친척 OO구청장 겸 향우회장으로 있는 향우회 임원진 참여
3) 대학친구 OO스타트업 대표 (매출 1000억원) 회사 마케팅/회계 고문
2. 강남/서초구 아파트 입성 자산 20억원 달성
3...
여긴 나름 대기업이지만 이런 자랑이 통한다.
어떻게든 쥐어짜 내서라도 FLEX 해야한다.
업무 처리 능력이 필요하다고?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여긴 대한민국이다. 연줄과 라인으로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 제가 시골 출신이지만 연줄이 대단하더라구요. 진작에 어필했어야 하는데, 좀 늦었나요?난 실력으로만 승부하려고 했지. 근데, 어쩌나. 아시잖아요? 아직 이런 사회인걸. 잠깐만요, 청와대에 카톡 하나만 보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