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 뭐 있죠? 로얄 패밀리라던가?"
너 뭐 돼? 라는 물음에, "응, 나 뭐 돼." 라고 답변하는 상상을 종종한다. [나 뭐 돼] 의 조건엔 뭐가 있을까? 요새 같이 빈부 격차가 벌어진 시점엔 강남 아파트 자가 보유일 수도 있고, 회사에선 오너 일가의 가족일 수도 있고, 부장급 아저씨들은 아이가 SKY에 입학한 것일 수도 있다. 보통 그런 과시는 카카오톡 프로필에 표가 난다. 여자들은 명품백을 은근히, 힙한 레스토랑에서 찍은 본인 뒷모습 사진 프레임 끝에 끼워두고, 남자들은 외제차 키나 로고가 박힌 핸들 사진을 우연히 프레임에 걸린 척 올려두는 식. 부장님들은 대놓고 서울대 마스코트 곰돌이 사진 앞에서 찍은 자녀 사진이나, 동남아나 일본 필드에서 골프채를 시원하게 휘두르는 사진을 올려둔다.
서얼록은 또 냄새를 맡았다.
기획팀에 갑자기 전배된 저 연구원은 보통 내기가 아닐 것이다.
이 의심은 전에 그 팀에서 일한 적 있는 동료의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책임님, 쟤는 재택을 자유롭게 하고, 유연근무제도 잘써요. 그 팀장님이 그러실 분이 아닌데."
그렇지, 갑자기 저 팀장님이 팀에서 부드러워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전처럼 날이 서 있지 않고, 어딘가 말랑말랑해진 느낌이다. 나이 오십이 넘어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서일 수 있지만,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이다. 말을 아끼고 행동을 조심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가만 보자, 저 연구원, 그러고 보니 회사의 MBA 과정의 리스트에도 올라와 있다. 회사 홍보 영상을 보니, 이번에도 라스베거스에서 연초에 열리는 국제 전시 행사에 참여한 듯 하다. 물론 본인 업무의 일환이니 넘겨짚지는 말자. 감이 오지만 좀 더 증거를 모아야 한다.
과연 서얼록은 다르다. 본인의 생각이 확증 편향이 될까봐 다각도로 증거를 모으고,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결론을 낸다. 젊었을 때 경력이 짧은 탐정 시절에는 종종 비슷한 실수로 일을 그르쳤다. 적게 모인 증거들을 바탕으로 직감에 의존해 쉽게 결론을 낸 것이다. 이를 테면, 화장실 변기에 똥이 담긴 상태로 변기 물이 넘친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 시간에 화장실에서 나와 황급히 뛰어가는 김대리를 봤다. 발에 물이 참방참방하며 뛰쳐 나왔다. 화장실에서는 변과 물이 섞인 듯 불순물이 섞인 구정물이 하수구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본인이 변을 발견하고 놀라 뛰쳐 나왔다면 그대로 다른 칸이나 다른 층에 있는 화장실에 들러 본인이 계획한 일을 마무리 했어야 하는데,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아, 저 똥의 주인은 김대리라고 서얼록은 확신했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김대리에게 넌지시 말했다.
"결자해지의 정신으로 변기통 위에 화장실 뭉치를 올려두던가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조치를 취했어야지!"
엥? 저 아니예요. 저는 양치하다 옷에 물이 튀어 화장지 좀 쓰려고 그 칸에 들어갔다가 저도 못볼 것을 본 것 뿐이예요. 하면서 항변했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다. 나는 신사답게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를 표했다.
너무 쉽게 결론을 내버린 탓이다. 눈에 보이는 정황만 보고 판단하면 이렇게 실수를 하곤 한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서얼록은 쉽게 결론을 내지 않는다. 증거가 명확해도 차분하게 스모킹 건을 기다린다.
근데, 요새 맡은 프로젝트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터라 저 연구원의 신분을 확인하려고 더 조사할 시간이 없긴 하다. 나는 빨리 결론을 내고 싶었다. 탐정 학교 스승님은 좀처럼 쓰지 않는 방법이고 권하지 않는 방법인데 지금은 시간이 없다. 왜냐면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크고,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소문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확신이 70% 이상일 경우에만 사용하도록 하자. 평소 친분이 있는 그 팀에 나이든 부장님과 티 타임을 가졌다.
"부장님 팀에 새로온 연구원 로열패밀리인가요?" 직접 묻는 수밖에.
이렇게 쿠션 없이 직진으로 질문을 할 때는 질문한 직후 그 다음이 중요하다. 말을 떼자마자 상대방의 행동을 면밀히 지켜봐야 한다. 얼굴, 손짓, 발 동동 등.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진실을 가리키는 순간이 많다.
이 틈새를 놓치면 안된다. 부장님의 눈썹이 씰룩이고, 갑자기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리고 말을 떼려는 입가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어렵게 여는 첫 대답에 힌트가 있다.
"나는 그런거 잘 몰라."
됐다. 처음 듣는 소리거나, 진짜 모르는 일이라면 "엥? 진짜야? 누가 그래?" 이런 반응이 먼저 나와야 한다.
"됐습니다. 저 촉 되게 좋아요. 저만 알고 있을께요."
"아니야. 나는 모른다고 했다."
서얼록은 '네,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