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결국 5번째 퇴사를 했다.
1년은 편한 마음으로 쉬기로 했다.
성과, 돈, 성장이라는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재미난 프로덕트를 만들며 여유를 찾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서.
돌아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첫 두 회사는 폐업했지만, 프랜차이즈 COO로 스카웃되어 6개월 만에 50% 성장시켰고, 초기 스타트업에 PM으로 합류해 PMF를 찾아내어 대형 VC로부터 투자 유치도 성공했다.
나의 좌충우돌 도전기와, 중간에 수없이 바뀐 목표들, 그 결과로 남은 배움을 글로 남겨보려 한다.
내 경험이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누군가에게 배움이 될 수 있길 바라며...
프로축구연맹(이하 연맹)에서 주관하는 교육을 수강했는데, 우수 수료생 자격으로 입사 제안을 받은 것이다.
정말 가고 싶던 곳이기 때문에 제안을 받은 직후 정말 기뻤다.
대학 졸업 후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평일엔 스타트업 인턴으로, 일요일엔 생계를 위한 알바를 병행하며 인서울 대학생들과 현직자들을 제치고 받은 제안이기에 더욱 뿌듯했다.
그러나 깊은 고민 후, 연맹의 제안을 거절하고 다니던 스타트업에 남기로 결정했다.
장밋빛 미래는 없었다. 팀이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열정과 인간미가 넘치는 팀원들과 밤낮없이 일했고, 시드투자 유치도 성공했다. 소셜벤처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BM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안정적인 직장 대신 스타트업을 선택했지만,
회사가 망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스포츠 스타트업에 들어갔을까?
왜 좋은 제안을 거절한 걸까?
왜 후회하지 않았을까?
대학교 1학년, 여자친구가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났다.
스무 살의 나는 강한 멘탈을 갖지 못했고, 곧장 우울증에 빠졌다. 잘못한 사람이 분명한데,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는 게 원망스러웠다.
지금은 이해한다. 각자 사회적인 관계와 체면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하지만 그때의 나는 침묵을 동조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끊었다.
힘든 시기에 나를 구원해 준 유일한 희망은 축구였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뛰면 힘든 상황을 잊을 수 있었다. 공을 발로 정확히 맞추는 감각은 기분 좋은 감정을 되살아나게 했다. 나는 축구를 더 잘하고 싶었다. 더 잘 즐기기 위해서.
운동 신경이 부족했기에 더 많은 지식을 공부했다.
어떤 훈련을 해야 공을 더 정확히 찰 수 있는지 이해하려고 해부학 책을 닳도록 읽었고, 강팀을 이기고 싶어 이탈리아 축구 감독들의 논문을 번역기 돌려가며 공부했다.
우울증은 축구에 대한 열정과 지식이란 유산을 내게 남겼다. 축구로 삶의 의미를 되찾았고, 6개월 만에 우울증을 극복했다.
전역한 뒤 자연스럽게 학과 축구팀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해 항상 1차전 탈락하던 약팀을 준우승 팀으로 만들었다.
우승엔 실패했지만 함께 했던 선/후배 팀 동료들과 1년 동안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나는 엘리트 중심 스포츠 문화를 바꾸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운동장을 빌릴 때 엘리트 축구팀이 사용하고 있어서, 우리 팀이 엘리트 팀이 아니어서 거절당한 경험이 많다. 나는 유럽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팀이 주기적으로 경쟁하며 리그가 만들어지면, 스포츠 시장이 커지며 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보람과 재미를 느낄거라 믿었다.
무리뉴처럼 “성공한 비 선수 출신 감독”이란 목표를 세웠다.
유명한 축구 지도자가 되면 사람이 되면,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출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유럽에서 연수를 받고 코치 경험을 하면 가능하다 믿었다.
첫 단계로 국내 지도자 자격증을 따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국내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고, 해외 연수에 필요한 5,000만 원의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축구 지도자에 대한 꿈이,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상경 직후 생활비와 유학비를 벌기 위해 스포츠 스타트업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B2G, B2B로 스포츠 CSR 사업을 기획하고, 코치와 오퍼레이터로 직접 사업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서울시, 아디다스, 데상트, 한화 갤러리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자생한방병원 등 1년 차 주니어에게 과분한 큰 조직과 함께 협업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내 몰입하게 되었다.
일을 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된 점이 컸다. MBA 출신의 대표님과 함께하며 조직의 미션과 비전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배웠고, 직접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며 아이디어가 어떻게 사용자에게 영향을 주는지 경험했다.
나는 문제를 해결을 좋아하는 기획자 체질이란 걸 깨달았다.
팀원들과 함께 참신한 기획으로 대성공을 거둔 경험이 결정적이었다.
지역아동센터 소속의 8-13세 어린이들이 참여하는, 2년에 1번 열리는 축제 프로젝트였는데, 클라이언트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참여하길 원했다.
연극 관람, 사생대회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고 한다. 성별과 학년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히 갈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평범한 운동회를 기획했다.
시간대별로 정해진 종목에 센터의 대표 선수가 나오고, 나머지 아이들은 응원을 하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표로 나오지 못하고 응원만 하다가 가는 아이들이 생길 것 같았다. 6시간 동안 응원만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떻게 해야 초등학생 어린이들 모두가 재밌을지 다시 고민했다.
우리가 모두 재밌는 경험을 찾았고, 수학여행 때 간 놀이공원을 떠올렸다.
왜 모두가 놀이공원을 재밌다고 느꼈을까?
우리는 “선택의 자유” 덕분이라 생각했다.
자이로드롭을 못 타는 사람은 바이킹을, 바이킹이 싫은 사람은 롤러코스터를 타면 되었다. 매점에서 솜사탕을 사 먹거나, 행진을 구경하기만 해도 재미있었다.
우리는 콘텐츠가 풍부하고, 참가자가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재미를 느낀다는 가설을 세웠다.
20개의 놀이형 스포츠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즐기는 “놀이페스티벌”로 기획을 변경했다. 사회자가 주도하는 운동회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원하는 부스에 들어가면 되었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도 가능했다.
대신 놀이 부스별로 스탬프를 주어, 최대한 다양한 놀이를 체험하도록 유도했다. 직접 아이들을 코칭하며 알게 된, 아이들이 환장하는 놀이형 스포츠 부스를 잔뜩 만들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다양한 난이도와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을 배치해, 성별과 나이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운동회가 진행되는 6시간 동안 쉬는 사람은 없었다.
남녀노소 모든 아이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당연히 클라이언트도 대 만족했다.
덕분에 2년에 1번 열리던 축제의 관행을 깨고, 다음 해에도 같은 포맷의 놀이페스티벌을 열 수 있었다.
훈련소를 수료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춘천 인근 펜션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아보니 프로축구연맹(K리그)의 축구산업아카데미 교육을 책임진 팀장님이었다.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제안을 주셨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조금만 고민해 봐도 괜찮겠냐는 말씀을 드렸다. 팀장님은 내게 1주일의 말미를 주셨고, 전화는 끊겼다.
순간 대학 입학을 결정하던 때의 기억이 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꾸준히 모의고사 1점대를 기록하는 모범생이었다. 6월과 9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선 1점대 초반을 기록했고, SKY에 가는 건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수능을 거하게 망쳤다. 평소보다 훨씬 못한 2점대 중반의 등급을 받았다. SKY는커녕 인서울도 겨우 할 수 있는 성적이었고, 모두 내게 재수를 권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수능 같은 시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시간을 쓰기 싫었다. 나는 성적에 맞춰 학교를 선택했고, 인기는 없지만 내가 가고 싶은 학과를 선택했다. 내색하진 않으셨으나 부모님은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 K리그 사무국에서 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만약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프로축구의 제도와 문화를 바꿔 풀뿌리 스포츠 문화를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명하고 안정적인 직장이기도 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부모님을 안심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니던 스타트업에서 도전을 이어가기로 했다.
배민, 토스 등 스타트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모습을 보며, 세상을 혁신하는 조직의 미션을 믿는 작은 조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에서 사람들을 가장 많이 움직이게 만드는 회사”라는 미션을 가진 회사에 남기로 했다.
정중하게 지금 회사에서 더 도전하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약속한 1주일째, 나는 팀장님께 전화를 드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행운을 빈다는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사실 우리는 B2B, B2G 영역에서 생존 이상의 매출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것”인 B2C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대로 해야 하는 B2B, B2G에 동기부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기관과 회사는 우리를 좋아했고, 계속해서 재계약하며 일을 맡겨줬는데 말이다.
우리는 B2C 서비스에 도전했다.
우리는 움직임이 부족한 지역사회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놀이형 스포츠를 제공해 입시 교육에 내몰리는 아이들의 신체적 심리적 문제를 놀이로 해결해 주고 싶었다.
놀이가 전인적 성장에 긍정적이라는 하버드대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자원봉사하는 대학생 놀이 코치를 배정하고, 구독료를 내는 아이들을 코칭하려고 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비즈니스 모델이지만,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투자하고 액셀러레이팅 한 투자사가 있었다.
우리는 꽤 열심히 했다.
아파트 단지에 꽃을 돌리고, 전단지 대신 손 편지를 보내며 진심을 전해봤다. 지역의 문화센터에 우리 수업을 론칭하는 방향으로 피봇도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사실 잘 될 리가 없었다. 없는 문제를 풀려고 했으니까.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짜 준 시간표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학원에 가기 바빴고, 부모님의 퇴근 시간까지 학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버드대 교수의 연구 결과만으론 입시-취업-결혼-출산까지 이어지는 굳건한 사교육의 사슬을 깰 수 없었다.
8년 전의 나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우리의 신념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깊이 실망했다. 끈기도 부족했고, 사업에 대한 노하우와 실행력도 부족했다.
실망이 컸던 팀원들의 열정도 점점 식기 시작했다. 회사 통장의 잔고도 줄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나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첫 회사를 마무리한 뒤, 나는 축구 지도자의 꿈을 포기했다.
더 이상 스포츠 도메인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세상의 문제라면 무엇이든 해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객의 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했을 때의 보람과 즐거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백은 길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투자사 대표님의 추천으로 빠르게 다음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처참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혹시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렇게 피봇해 볼 것 같다.
[B2C 비즈니스]
1. 타깃 : 3~7세의 유치원을 가지 못하는 어린이
2. 서비스 방식 : 방문 교육
3. 가능하면 명문대 재학생이나 휴학생을 강사로 섭외
4. 방문 돌봄 이모보단 비싸고, 고급 영어 유치원보단 저렴한 가격
5. 아이들의 발달을 고려한, 고퀄리티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
6. 3~5세 사이의 신체활동이 아이의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하는 연구 결과를 폭발적으로 바이럴
7. 수요가 늘어나면, 여러 명을 한 집에서 교육하는 그룹 모델을 런칭. 기존 모델보다 조금 저렴하게.
[B2B, B2G 비즈니스]
1. CSR 플랫폼 제작
기업 산하의 재단이 CSR 사업 수요를 업로드하면, 사회복지법인이나 마케팅 대행사 같은 공급자가가 바로 컨택할 수 있게
2. 완벽한 UX의 자사몰 구축
기업의 CSR담당자가 우리에게 사업을 쉽게 의뢰할 수 있도록
3. 레크리에이션 카테고리로 확장
스포츠 CSR 경험을 살려, 기업 워크샵 등 레크리에이션이 필요한 영역으로 서비스 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