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스토리텔러 응모
몇 년 전 이야기다. 어느 프랑스 관련 행사를 방문했다. 갓 시작한 여행 에디터로서 호기롭게 명함을 건네고 인사를 나눴다. 예상했던 질문을 야구 배팅하듯 잘 치던 찰나, 생각지 못한 난관을 만났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오므렸지만, 미소는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I'm sorry, Could you say that again for me?"
영어인지 불어인지 모를 억양이 귓가에서 뇌로 넘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한 번은 정중하게 되물었지만, 다시 듣는데도 버퍼링 그 자체였다. 쿨하게 그녀는 이따 보자고 했지만, 다시 만난들 발음의 장벽이 허물어질 리 만무했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야 괜찮지만, 여행업의 연장선에선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분위기 참 좋았는데, 매력적인 인상을 주지 못해서 아쉬웠다.
현장을 떠났어도 마음 속에 콕 박힌 총알 몇몇은 불쑥 신경을 건드리곤 했다. 다녀왔거나 가고싶은 여행지가 펼쳐지는 외화를 볼 때면 더욱 그랬다. 자막이 나타나도, 본능적으로 청각이 먼저 화면으로 다가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밀리 파리에 가다 Emily in Paris>를 만난 날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미국에서 프랑스로 넘어온 에밀리는 나와 달랐다.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이 있었다.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스스로의 강점으로 하루하루를 극복했다. 언제나 허리는 꼿꼿했고 눈빛을 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았다. 실수가 있더라도 사랑스러운 표정과 재치로 파리를 만끽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그녀는, 미국과 프랑스의 간극을 가뿐하게 넘나들고 있었다.
** 스페인어인 티키타카(tiqui-taca)는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뜻하지만, 요즘은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를 의미하는 듯하다.
사실 우린 에밀리가 두려워요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더 좋을지도 모르니까.
우린 당신이 와서 더 열심히 수익을 내야 하는 부분이 무서운 거예요.
'워라밸'이죠. 미국인들은 일하기 위해 살잖아요.우린 살기 위해 일해요.
파리에 와서 프랑스어도 안 한다는 게 오만한 거죠.
You Know, We are all a little afraid of you.
Your ideas. They are more new. Maybe they are better.
Maybe we feel we have to work harder. Make more money.
'A balance.' And I think the Americans have the wrong balance.
You live to work. We work to live.
You came to Paris and you don't speak French. That is arrogant.
오만이라기보단 무지인 거죠. 기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요.
More ignorant than arrogant. I'm sorry if offended you.
무지의 오만이라고 합시다. 나는 남의 말에 기분 상하지 않아요.
Well, Let's call it. The arrogance of ignorance.
I'm not offended by anything.
1화 직장동료 뤼크와 에밀리의 대화 중에서
** 직장동료 뤼크는 회사의 눈치를 보면서도 에밀리를 위해준다.
에밀리는 미국 시카코 마케팅 회사에서 프랑스 파리로 1년간 출장을 가게 된다. 불어 잘하는 직원의 임신 소식으로, 에밀리는 꿈에 그리던 파리 일상을 시작한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지만, 그녀는 포기하는 법이 없다.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프랑스인의 불어에 대한 자부심 앞에서도 그랬다. 회화 학원을 다니며 집 주변 상인들에게도 마음을 나눈다. 어느덧 주변 사람들도 그녀를 만나면 미소를 건넨다.
일로 만난 사이는 더욱 녹록치 않다 하더라도, 에밀리는 자신의 소신을 잊지 않는다. 충분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실수가 있다고 해도 주눅들 이유는 없다. 행사든 미팅이든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고 해서 피한다면, 그녀처럼 프랑스 파리를 온 몸 가득 담아낼 수 있을까. 같이 살아봐야 진정한 여행이란 문구는, 비단 행복이란 단어만을 품진 않을 것이다.
란제리 선물은 날 위한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한 거예요.
섹시하고 힘 있는 사람이란 기분을 느껴보란 의미였어요.
하지만 사과하죠. 나와 기준이 다른 건 이해해요.
I didn't buy it for me. It was for you.
I wanted you to feel sexy and powerful.
But I apologize. I understand you may have different boundaries.
배려는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과했어요. 기혼 의뢰인의 란제리 선물은 더욱 그렇죠.
It was very thoughtful but no, it was unnecessary.
I don't usually accept lingerie from clients.
Especially married clients.
4화 향수를 다루는 메종 라보의 소유주인 앙투안과 에밀리의 대화 중에서
**앙투안은 향을 조합하는 최고의 조향사로서, 프랑스 감성 그 자체인 인물이다.
한국 사람으로서 미국보다 자유로운 프랑스란 뉘앙스가 단번에 와닿진 않는다. 나라와 나라의 차이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가치관으로 귀결될 수 있는 대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앙투안은, 에밀리에게 남성으로서 프랑스 파리 그 너머의 자유로움을 언급한다. 그 정점은 향수 광고 촬영장에서 나눈 그 둘의 이야기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이란 가치관 사이에서 더욱 팽팽하게 부딪친다. 과연 에밀리의 재치는 어떤 해법을 이끌어낼지.
전 다함께 성공하고 싶어요.
언어차이로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저도 전진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줘요.
Look, Sylvie. I want us to win together.
And maybe some things get lost in translation.
But just know that I'm finding my way.
한 잔 하러 갈 건데, 끼어도 좋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네요.
We're going for drinks. You can join us if you want, but I think you have better things to do.
아랫집 사람이에요 복잡해지는 건 싫다고요.
He lives downstairs. I don't wanna make it complicated.
저런, 때론 복잡한 관계가 가장 멋져요.
Oh, sometimes the best relationships are complicated.
4화 프랑스 마케팅 회사 사부아르의 실세, 실비와 에밀리의 대화 중에서
**실비는 상사로서 깐깐한 면모로 에밀리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인물이다.
앙투안과 실비는 내연관계다. 에밀리는 실비에게 앙투안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온전히 소유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실비는 누군가를 소유할 생각도, 소유될 생각도 없다고 응수한다. 연애든 결혼이든 모든 걸 보장하진 않는다고 못을 박는다. 동화에 불과한 못 만든 영화라 여긴다. 오히려 에밀리에게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해피엔딩을 이루어줄 것 같냐고 되묻는다.
이별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장면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그녀들의 눈빛은 모두 사랑바라기 같았지만, 달랐다. 실비가 담고 있는 허무함에 대한 이면을 시즌2에서 다루어줄지 궁금하다.
에밀리의 동료 뤼크는 미국식 로맨틱 코미디는 너무 작위적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프랑스식 엔딩을 언급한다. 희극보단 비극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자부한다. 에밀리는 영화란 현실을 잊으려고 보는 것이 아니냐며 묻지만, 그들은 현실은 떨쳐낼 수 없다며 손사래를 친다.
당장 여행을 떠난다해도, 이런 티키타카를 나눌 수 있을까. 전직 여행 에디터로서 본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어떤 원고보다 흥미진진했다. 독자들도 이런 걸 원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주인공이 원하는 타이밍에 탁탁 들어맞는 드라마라는 게 조금은 흠이지만, 약간의 양념쯤이야 눈 한 번 감아줄 수 있을 테니.
요즘은 인플루언서의 여행기만큼 믿음직한 가이드북이 또 없다. SNS를 활용하며 마케팅 센스를 발휘하는 에밀리의 영민함도 감상 포인트다. 당연한 듯 여겼던 여행길이 재개되면, 그녀의 발자취를 미리 기록해보는 것도 러블리한 파리 기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