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것도 내게는 호사로운 일
태생적으로 작가라 믿는 내가 글쓰기에 올인하지 못하는 이유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비로소 고향에 온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차분해진다. 좋은 글을 읽는 것도 좋고 고요하게 마음 가라앉혀 글을 쓰는 것도 참 좋다. 피아노를 치거나 그림을 그릴 때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 내가 행복하게 여기는 순간이 바로 이것을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씩 글쓰기와 마주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재작년 6월에 나의 책 "언어의 맛"을 출간하고는 또 그렇게 글쓰기로부터 멀어져 침잠한 채로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를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런 이유.
많은 사람이 그러하겠듯이, 나는 마음이 고요할 때 글이 잘 써진다. 아니, 늘 그런 마음 상태로 글을 쓰고 싶다. 걱정거리, 챙겨야 할 일들, 돈벌이, 사람과의 마찰 등으로 마음이 시끄럽고 분주할 때에는 글쓰기를 기피하게 된다. 저 안의 나의 우물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이 진정한 글쓰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란 적나라할 만큼 솔직하게 나와 마주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그러기에 처해진 현실을 외면한 채 글을 쓰는 것은 위선이며 가식이라 여겨왔다. 그것을 알기에 각박하고 퍽퍽한 현실에 발을 디딘 채 글을 쓰기란 내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 모든 불편한 현실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는 것이 죽기보다 싫게 느껴지기도 했다.
젊은 날의 숱한 습작의 시기에는 차라리 아무것도 겁나는 게 없었다. 그저 생각의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면 되는 유쾌한 작업이라 여기며 마냥 신나게 글을 썼었다. 그러나 명색이 출간 작가이고 보니,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번번이 발목 잡히고 만다. ' 보다 더 잘 써야지 ~~ ' 하는 강박과도 같은 외침 소리 말이다.
그런 저런 이유들이 나의 무의식에서 부정적 작용을 한 것 같다. 루틴이 잡히고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면 습관처럼 글쓰기 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시작될 수 있을 텐데, 온갖 핑계가 앞서 바쁘게 가야 할 글쓰기 여정의 길목에서 자주 서성거리곤 했다. 그러는 와중에 생겨나는 조바심과 불안함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음으로 해서 얻게 되는 또 다른 부산물이다.
작가임에도 전업 작가로서 살 수 없는 현생의 시간들 속에서, 그나마의 글을 쓰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한다. 그래야 겨우 알량한 글 한편이 나올 수 있다. 예전처럼 하루 이틀 밤을 새우고도 버틸 만큼의 튼실했던 강단도 이제는 쇠잔해졌다. 그래도 혼자만의 고독한 글쓰기 시간에 함께 해주던 음악을 다시 꺼내어 듣게 된 덕에 키보드 위에서 무심한 듯하게나마 타이핑이 되고 있으니 다행이다.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듯 의식의 흐름대로 그냥 그렇게 글이 흘러감에 나를 맡겨본다.
그래도 이렇게 글을 적고, 그것을 저장하여 마음에 품고, 세상으로의 통로가 되어 나의 글을 발행할 수 있는 브런치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바쁘나마, 그리고 기력이 달리나마, 나의 공간이 있으니 그곳에서 나는 내 영혼이 진정 기뻐라 하는 글쓰기의 호사를 누려본다. 다시 말하지만, 글쓰기는 타인에게 보여주기에 앞서 나와의 만남이라 여기기에, 이렇게 나를 만나는 시간이 기쁘고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 시간과 이 공간을 벗어나면, 나는 또다시 일상의 업무에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할 것이다. 아마도 한동안은 이렇게 글쓰기에 올인하지 못한 채 글쓰기 시간을 동경하며 지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글쓰기와 다시 만나는 순간들의 텀을 좀 더 당겨보기로 다짐해 본다. 빈도가 잦아질수록 그만큼 나는 더 행복해질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것과도 같은 이 호사를 세상 일에 치여 더는 놓치고 싶지 않다. 어쩌면 하늘이 내게 준 치유의 선물과도 같은 이 호사로운 일을 이제는 기꺼이 누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