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우 Oct 05. 2024

<흑백요리사>가 매력적인 묘한 특징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캡쳐

요즘 <흑백요리사>를 정말 재밌게 보고 있다. 보면서 이 프로그램이 주는 재미가 무엇인지 고민해보게 되는데, 묘한 특성들이 몇 개 있다고 느낀다.

1. 우선, 이 프로그램은 '맛'만으로 모든 승패를 나눈다고 하지만, 정작 시청자는 그 맛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시청자는 모든 과정을 흥미롭게 보면서도 결과적으로 승패를 따질 수 있는 기준이나 방법이 없다. 시청자는 오직 심사위원의 권위에 복종하여 따를 수밖에 없으며, 기껏해야 심사위원이 흘린 몇 마디 말에 대한 2차적인 평가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여타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매우 차이나는 지점이다. 가령, 연주로 승부보든, 춤으로 승부보든, 노래로 승부보든 시청자는 항상 자신도 평가하면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흑백요리사>에서 시청자가 참여할 요소는 매우 미미해지고, 완전한 관전자로 후퇴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묘한 편안함을 준다.

특히, 심사위원들이 그 분야의 권위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탈락시키거나, 소위 '연민'을 자아내는 출연자들을 탈락시켜도 반발이 일어날 수가 없다. 대부분은 그저 안타까워하거나 놀라며 볼 뿐인데, 시청자는 '맛'을 모르기 때문에 그 권위에 저항할 방법이 없다. 마치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증명한 것처럼, 이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은 권위에 편안하게 순응하며 눈 앞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시청자들이 할 일이란 한편으로는 권위에 철저히 복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상상'하는 일 뿐이다. 저 음식이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하며 선망하는 것 밖에 없고, 실제로 <흑백요리사>에 등장한 요리사들의 음식점은 전보다 더 인파가 몰리고 있다고 한다. 권위에 대한 복종과 상상에 대한 갈망의 결합이라니, 이보다 매혹적인 구조가 현대 소비문화에 또 있을까?

2. 두번째로는, 이 프로그램에는 '말을 얹는' 사람들이 거의 부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최근의 관찰 예능 등을 보면, 대부분 현장을 '관찰'하는 패널들이 등장한다. 이 패널들은 해설하거나 웃음과 감동을 유도하면서 시청자와 함께 현장을 '구경'한다. 가끔은 억지로 웃음이나 감동을 연기하기도 하는데, 시청자들의 동조 현상을 유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어떻게 보면, 매우 건조하게 현장을 보여준다. 물론, 현장 내에서 구경하는 다른 요리사들이 중간중간 말을 얹긴 하지만 별로 비중이 높지 않다. 시청자들은 마치 순수하게 현장을 매우 밀착해서, 가까이에서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중간중간 패널들이 유도하는 반응이 따로 없다 보니, 마치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느끼는 것만 같다.

이 기묘한 현장감, 정작 가장 중요한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다른 필터링 없이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 같은 이 가까움, 밀착감, 현실감이 호소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실제로 요리사들도 자신의 명예와 쪽팔림, 자존심 등을 걸고 최선을 다해 순간에 임한다. 기존의 권위 있는 요리사들은 이 프로그램 안에서만 유효한 '새로운 권위' 앞에서 처절하게 박살나기도 한다. 여기에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그냥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3.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이 <흑백요리사>가 시청자들에게 마치 하나의 '새로운 현실'을 제공해준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새로운 현실에서, 우리는 새로운 권위에 복종하면서, 기존의 권위가 처절하게 박살나며, 끊임없이 상상을 갈망할 수 있고, 그 모든 걸 '진짜 현실'처럼 체험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위장된 현실이다. 맛이나 취향에는 그런 절대적인 기준도 있을 수 없고, 실제로 우리가 그 '맛'에 접근한다면, 그런 권위도 유지될 수 없다. 선망하는 그 모든 TV 속 음식 또한 막상 '도달'하고 나면, 상상만 못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즐기는 것은 이 가짜 현실의 완벽함, 그리고 생생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뷰버와 인플루언서의 '나락'에 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