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란, 대개 성취 보다는 포기와 관련되어 있다. 사실, 자기 자신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자기합리화 같은 이성의 작동도 그리 필요하진 않은 듯하다. 오히려 어떤 욕망, 이성의 작동, 이런 것들을 '그저 내려놓고'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화해를 이룬다. 그냥 삶을 인정하는 순간, 삶과의 화해가 시작된다.
헤겔의 의하면, 화해란 "이성의 승리가 아니라 우리 행위의 비극적 차원을 받아들이는 일"이다(zizek, 2020). 달리 말하면, 인생의 화해란 인간의 운명이랄 것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언젠가 죽고, 우리의 욕망은 모두 성취될 수 없으며, 나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잘 살아내고자 애를 쓰되, 삶에 주어진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도, 실패도, 좌절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사람이 겸손하거나 겸허해야 한다는 것은 그저 그것이 사회적인 인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겸허해야만 삶과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처참한 비극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것, 혹은 내가 어떻게 하든 삶에는 비극이 들어설 수도 있다는 점을 그저 겸허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자괴파괴적인 수순을 밟게 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엔가,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만다.
유발 하리리가 미래의 인류에 대해 흥미롭게 상상한 것이 하나 있다. 만약, 인간이 사실상 불멸할 정도의 수명을 부여받게 된다면, 그 누구도 모험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웬만해서는 죽지 않게 될 경우, 인간이 굳이 에베레스트에 오르거나 목숨을 건 고행과 스포츠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에 존재하는 '모험'들은 사실상 인간이 죽기 때문에 가능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모험을 해보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운명을 인정하면, 모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인간 운명에 대한 겸허한 인정은, 어찌 보면 삶을 더 치열하고 온전하게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겸허한 태도라는 건 순응적이고 소극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겸허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힘이기도 한 것이다. 어차피 죽을 운명을 겸허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인생을 놓고 가장 멋진 모험을 해볼 수도 있다. 그 결과를 겸허히 수용할 용기만 있다면, 우리 삶을 더 멋진 것에 걸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삶과 화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삶을 더 온전하게 살아낼지도 모른다.
반면, 삶과 화해하지 못한 인간은 결국 어떠한 비극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소극적인 자기 방어에 머물게 된다. 아니면 자기 욕망이 실현되지 못함에 분노하여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과거에 집착하고, 미움과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으로 타락해갈 것이다. 어느 쪽도 삶을 '진정하게' 살아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며 버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한 번 뿐인 삶의 운명을 겸허하게 수용하며 한 번 멋지게 살아보기 위해 이 삶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화해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