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열심히 쓰긴 하지만, 사실 책 소비에 더 진심인 편이다. 매달 10-20권 정도 책을 사는데, 먹는 것, 입는 것 별로 관심 없는 내게는 최대 소비 부문이다. 당연히 그렇게 산 책을 곧바로 다 읽을 수는 없고, 절반 정도는 그냥 쌓아둔다. 얼마 전에는 책장도 하나 더 들였다. 별 수 없는 게,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바로 사버리기 때문이다.
책을 사서 쌓는 건 내게 '읽고 싶은 욕망'을 저장해두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책을 읽고 싶다는 건, 그 책 내용을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다는 욕망, 그 지식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래서 조금 더 똑똑하거나 현명하고 넓고 깊게 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두루 품고 있다. 이런 욕망은 그 순간 캐치하여 붙잡아두면, 일종의 보물이 된다. 그런 욕망들이 '물화'되어 한 방에 가득 쌓여 있으면, 일종의 보호막 혹은 성채가 된 느낌마저 든다.
내가 느낄 때,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은 다른 욕망들보다 나은 것 같다. 우리 시대에는 무수한 욕망들이 매일같이 내 안으로 침범한다. 온갖 화려한 소비를 즐기고 싶다는 욕망, 자극적인 어그로를 끌어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 남들 등처먹고 사기치고 조롱하고 싶은 욕망 등 온갖 욕망들이 들끓고 있다. 그런 와중에 '책 읽어서 똑똑해지고 평화로워지고 싶다'는 욕망이란, 나에게는 가장 가치있는 최상위 욕망처럼 느껴진다. 이런 욕망은 들었을 때, 곧바로 캐치해서 방 안에 보물처럼 가둬두고 쌓아놔야 한다.
그러면 당장은 안 읽더라도, 언젠가, 불현듯, 무심코 책장 앞을 지나치다가 그 때 그 책을 읽고 싶다고 느꼈던 '그 욕망'이 부활할 때가 있다. 그럼 곧바로 그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 온갖 전 세계 시총 최상위 빅테크 회사들이 만들어낸 ai 알고리즘도 그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스마트폰은 개나 줘버리고 그 욕망의 흐름을 따라간다. 가끔은 밤에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한 책에 꽂혀서 하루이틀만에 다 읽어버릴 때도 있다.
나를 내가 선호하는 욕망 안에 가둔다는 것. 나에게는 이것이 일종의 삶의 생존 전략이다. 쓰레기 같은 콘텐츠들에 나의 시간을 허비하며 하루 스크린타임 5시간씩 찍는 것보다, 내게 더 필요하고 정확한 욕망들을 간직하며, 최대한 내가 그 욕망들 쪽으로 기울어갈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력 같은 건 믿을 게 못된다. 오죽하면 주기도문에서도 인간은 신에게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옵고" 하면서 빌겠는가. 기껏 할 수 있는 건 환경 세팅, 욕망의 수로, 나를 집어 넣을 시스템 만들기다.
그래서 나는 책을 반드시 '당장 읽을 것만' 사는 게 아니라, '읽고 싶으면' 일단 지르고 본다. 이 욕망들이 나를 성처럼 보호해주고 있으면, 삶의 다른 하잘 것 없는 유혹들이 덜 시달린다고 느낀다. 내 방에는 아직 몇 년에 걸쳐도 다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있다. 그러나 결코 다 읽을 수 없는 그 욕망의 여정이 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기에, 나는 보호 받는다. 내게는 욕망을 따라 모험할 세계가 저 멀리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를, 이 끝없는 여정을, 보다 사랑하게 된다.
*사진은 비교적 최근에 산 책들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