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내 삶에 3년 정도 밖에 시간이 없다면, 나는 모든 귀찮음과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1주일에 한 번씩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지난 3년을 돌아보면, 내 주변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친척들도 있고, 선배도 있고, 몇 살 많은 지인, 심지어 또래도 있다. 연예인이나 샐럽은 더 많다. 삶이란 의외로 빨리 끝나는 것이고, 속절없이 허무한 것이다. 그러니 언제 죽더라도, 나는 내 최대치의 삶을 살아냈다고 믿으며 죽고 싶다.
나는 오늘 내가 살 수 있는 최고의 하루를 살았는가. 물론, 내가 살 수 없는 삶을 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내가 보기에 '남들'이 사는 최고의 삶이 아니다. 그냥 내가 살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스스로 최선의 삶을, 최고의 삶을 살았는지 묻게 된다. 그건 꼭 최선을 다해 야근을 했는지, 자기계발의 화신이 되었는지, 재테크의 신처럼 단타에 성공했는지 묻는 게 아니다. 그저 내 기준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들에 최선을 다했는지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독서에 진심이라면, 정말 읽고 싶은 책, 죽기 전에 읽고 싶었떤 책을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즐겁게 읽었는가.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죽어도 좋아'라고 할 만큼 깔깔웃는 순간을 함께 보냈는가. 냉장고에 쌓인 식재료 중에서 가장 맛있는 조합의 음식을 오늘 해먹었는가. 내가 오늘 쓸 수 있는 최고의 글을 썼는가. 24시간 중에서 적어도 몇 시간 만큼은 내 마음을 다 뽑아낸 것만큼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는가. 내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의지력에는 한계가 있고 매일 그와 같은 최선의 의지로 살기는 어렵다. 수험생활에만 하더라도, 1년 365일 내내 똑같은 의지와 강도로 공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3년 정도 시간이 남았다는 생각을 선호한다. 3년 정도 안에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 지식, 능력, 삶에 대한 사랑을 다 쓸 것이다. 3년 간 분배해서, 그 안에서 남김없이 삶을 다 써버릴 것이다. 3년 뒤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고 심장이 터져 죽어도 좋다고 믿어보는 것이다.
삶이 신비로운 건, 실제로 그렇게 3년 뒤가 되어도, 인간은 고갈되어 말라비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힘의 생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사랑, 운동, 취미, 일로 가득 채운 3년을 살아낸 사람이 3년 뒤에 말라 비틀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오히려 그는 더 큰 활력과 힘으로 자기 가치를 실현하면서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3년 뒤에는 고갈되지 않고 더 커진 의지가 그를 나아가게 하고 있을 것이다.
다시, 나는 내가 지금 모든 귀찮음과 두려움을 버리고 내 삶의 최대치 의지력을 발휘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지금 나는 너무 귀찮고 하기 싫고 내 안의 온갖 합리화로 무장하고 있는 그 무언가를 해야 한다. 풀잎 사이에 숨은 독사를 찾아내듯 바로 그 무언가를 낚아채서 그야말로 삶의 최대치의 의지로 움켜쥐어야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3년 안에, 혹은 3년간 천천히, 한 번 발견한 사냥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 명사수처럼, 바로 그것을 최대치로 행해야 한다. 내게는 그것이 곧 삶에 대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