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가치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누군가는 나이들어서 예쁨을 유지하는 일에, 누군가는 매주 교회를 찾아가는 습관에, 누군가는 품위 있는 소비생활을 유지하는 일에 삶을 의지하고 있다.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고 믿으면서, 그 가치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아마도 나약한 동물이어서 무엇이든 자기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에 기대지 않으면, 좀처럼 삶을 견딜 수 없는 것 같다.
누군가는 나는 지식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관념에 기대고 싶어하고, 또 누군가는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생각에 기대고 싶어한다. 담배가 하루를 위로한다고 믿기도 하고, 술이 기분 좋게 해준다는 사실을 신봉하기도 한다. 그런 저마다의 기댐이 각자의 삶을, 존재를, 자아를 견디게 한다. 그렇게 기댈 것이 없으면, 삶이란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남들은 몰라도 내가 입은 옷이 고급 브랜드라는 사실, 내가 타는 차가 큰 돈 들여 샀다는 사실에 기대어, '나는 꽤 잘 살고 있어'라고 믿고 싶어하기도 한다.
100만 원을 가지고 주식투자를 해서 20만 원을 벌어도, 액수로 치면 대단한 게 없지만 '나 투자 잘하네.'라는 자부심에 기대고 싶은 게 인간이다. 그런 자부심조차 없이 삶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다. 하다 못해,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잘 골라도 '역시 난 좋은 음악을 잘 고를 줄 알아.'라고 믿으며 스스로 위로하는 게 사람인 듯하다. 나 역시 나의 가치들에 기대어 있고, 내가 믿는 것들에 의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책이나 글쓰기라는 가치에 많이 기대고 있다. 어차피 죽고 나면 다 사라질 것, 인생에는 더 많은 재미와 쾌락도 있을 수 있고, 더 큰 돈을 벌어주거나 더 남들이 알아주는 일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믿는 가치에 기대어, 그냥 매일 책을 읽고, 글도 쓴다. 내가 책을 매달 10권씩 읽고 쌓는 것은, 내가 책에 부여한 가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조차 믿을 수 없다면, 이 허무한 삶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가끔은 길을 걷다 보면, 온 세상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는 것들이 보이곤 한다. 다들 그래도 조금은 세련되거나 어려 보이는 데 가치를 부여하고 있구나. 그래서 매일 그렇게 자신을 가꾸거나 다이어트 하며 운동하고 옷을 사입는 일에 의지하며 삶을 견디고 있구나. 명품을 차고 다니는 건 역시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면 삶을 견딜 수 없어서겠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구든 매일 흩어져 사라지는 이 삶을 어딘가에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내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청년 시절에는, 내가 믿지 않는 다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내가 나만의 가치를 더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약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나의 가치를 믿기 위해 매일 애쓰며 살아가지만, 조금은 남들의 가치를 인정하는 법도 배우고 있다. 어차피 다들 이 가냘픈 삶에서 각자 필요한 것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겠거니,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별반 가치 없다고 믿는 것들을 사랑하며 그에 의지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도 나와 다르지 않겠거니, 생각한다. 어차피 매일 사라지는 삶에서 무엇 하나라도 붙잡고 싶은 게 인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