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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등한시하며 살지 않았다

by 정지우


결혼할 때 나는 돈도 없었고, 아울렛에서 기성복 양복 하나를 사서 결혼식 때 입었다. 주위에서 보니, 호텔에서 아니면 결혼 안 한다는 사람도 있던데, 우리는 성당에서 소박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냉담 중인 신자라 고해성사를 하긴 해야 했지만, 나름 어릴 적 세례 받고 간간이 성당을 다닌 신앙심이 있긴 해서, 성당에서 결혼하는 게 좋았다. 나는 친한 친구도 별로 없었기에, 축가도 그냥 형편없는 실력으로 내가 스스로 불렀다.

결혼 이후에도 마냥 풍요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진 않았다. 나는 학비랑 용돈 정도나 간신히 버는 수험생으로 3년을 살았다. 나중에는 학비가 모자라 대학생 때 모았던 책들을 중고로 팔면서 보탰다. 그 당시 집안 사정도 어려워졌기에 어디에 도움을 청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수험생활 마지막 1년에는, 아내랑 장거리 부부 생활을 하며 아이를 반년씩 키웠다. 첫 반년동안 아내는 주말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30대에의 절반 정도까지는 고생이 쉬이 끝나진 않았다. 삼십대 중반에 처음 신입사원 생활을 하고, 둘이서 맞벌이를 하던 시기에, 코로나가 도래했고, 아이는 코로나만 3번을 걸렸다. 요즘은 종종 양가 부모님이나 이모님 없이는 육아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도 듣지만, 서울에 왔을 때 우리는 아무도 없었다. 둘이서 혼신의 반차 돌려막기로 아이가 아플 때도 어떻게든 둘이서 해결했다.

그래도 우린 그 작은 전세 오피스텔에 살던 시절, 코로나로 격리되어 셋이서 갇혀 있던 때의 이야기를 재밌게 추억하곤 한다. 나름 셋이서 붙어서 뒹굴거리던 게 그립다고 말이다. 마치 삼위일체처럼 어디든 셋이서 붙어서 굴러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셋이 된 것을, 셋이서 살아가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느 봄날, 벚꽃이 만개한 밤에 우리는 와인 한 병과 잔 2개를 들고 집 앞 벤치로 나갔다.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우리는 벚꽃 아래에서 와인을 마시며 놀았다. 우리에겐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30대를 돌아보면, 나는 내 거의 모든 시간을 가족에게 썼다. 글 쓸 시간이 부족하면, 직장 동료들이랑 밥 먹는 시간을 줄여서 점심 시간에 썼다. 그렇지만 저녁이나 주말은 거의 다 가족이랑 있으려고 했다. 특히, 주말은 다른 행사나 약속으로 쓴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모임을 열더라도, 온라인으로 아이가 잠든 밤 9시 이후에 열었다. 공간이 없어 드레스룸 구석에서 간신히 짐 가려놓고 온라인 글쓰기 모임하던 때가 생각난다. 지금처럼 강의나 방송을 부지런히 다닌 건 회사를 그만둔 이후의 일이다.

누군가는 나의 삶이, 우리의 삶이 궁상맞거나 불행해보인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자고로 행복한 삶이란, 근사한 5성급 호텔 결혼식을 시작으로, 입주 이모님이 아이를 다 봐주면서, 부부는 뮤지컬 보러 다니고 한강이 보이는 신축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아낸 30대에 일말의 후회가 없다. 내게는 명확한 우선순위가 있었고, 그에 따라 내가 믿는 최선의 삶을 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 우선순위는 우리의 약속, 사랑을 지키는 것, 그렇게 우리의 가치 안에서 행복과 만족을 알고 추구하는 것이었다. 가족이랑, 아이랑 1분이라도 더 함께 있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이 함께 경험하며 사는 게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내가 믿지 않는 가치에 한 눈 팔면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등한시하며 살지 않았다. 남들에게 쉬이 휘둘리지 않고, 오직 나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을 살고자 애썼다. 어쩌면 그랬기에 멀어진 인연이나 놓친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에 비하면 별 게 아니었다. 나는 좋은 삶을, 사랑을 지키느라 온 마음을 다 쓴 30대를 살았다. 그리고 그건 내가 살 수 있는 가장 값진 30대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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