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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에게 받은 최악의 기념일 선물

by 정지우


Photo by Kira auf der Heide on Unsplash.jpg Photo by Kira auf der Heide on Unsplash


한 결혼정보업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혼 남자들이 꼽은 여자친구에게 받은 최악의 기념일 선물은 '1위 손편지, 2위 건강식품, 3위 책'이라고 한다. 아내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다가 해준 이야기인데, 듣고 상당히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 1위가 손편지이고, 2위가 책 정도쯤 되기 때문이다. 건강식품도 싫지 않다.


요즘에도 아내가 생일날 뭐 줄까, 결혼기념일날 뭐 사줄까, 하면, "글쎄... 갖고 싶은 게 없어. 편지나 써줘." 그게 항상 나의 대답이다. 사실, 내가 평소에 사는 것도 먹는 것이나 몇 권의 책 정도이고, 그밖의 물건들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구두를 한 10년쯤 신은 것 같아서, 너무 낡은 터라 슬슬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신발을 하나 샀다. 신발 하나를 고르고, 신어보고, 사기까지 필요한 욕망이라는 게 생기기 너무 힘들었달까.


청년 시절에는 아마도 돈이 없어서 명품에 관심 없나 싶기도 했으나, 나이가 들어 돈이 생겨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시계는 결혼할 때 사놓은 게 있는데, 손목만 무거울 뿐 귀찮고 아무 의미를 느낄 수 없어서 일년에 몇 번 차지를 않는다. 옷이든 뭐든, 그런 욕망은 점점 줄어들기만 해서, 이제는 과연 여생에서 내가 돈이 왜 필요하긴 한가 싶은 의문도 든다. 그저 아이 먹고 싶은 것 사주고, 언젠가 마당 있는 집 한 채 갖고, 여행 다니기 위해 필요한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이 세속에서의 욕망이랄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시간이 아닌가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만들어가는 따뜻한 시간 같은 것. 함께 좋은 대화를 나누고, 좋은 분위기 속에서 안락함을 느끼며 오랫동안 삶과 세상에 대해 나눌 수 있는 시간. 내가 원하는 글을 쓰고, 원하는 것을 읽고, 볼 수 있는 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달리고, 무언가를 배우고, 도망치듯 떠나며 누리는 세상 끝에서의 시간. 삶을 냄비에 넣고 끓이거나 찌듯이 만들어내는, 복작거리는 어떤 부드러운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을 원한다. 손편지는 그런 다정함과 정성이 녹아 있어서, 편지를 읽고, 그 여운을 느끼는 시간을 준다. 그래서 좋다.


그렇게 보면, 나는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게 오랫동안 시간이었다는 걸 느낀다. 어떤 시간들을 지키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또 얻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방황하고 고민해왔던 것 같다. 내게는 그 어떤 정교한 명품 보다도, 내가 바라는 아주 섬세하고 정교한 종류의 시간이라는 게 있다. 내게는 내가 얻고 싶은 시간이 있다. 그리고 조금은 그런 시간들을 얻은 삶을 살고 있다. 내게 희망은,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더 많이 얻는 것이다. 그 시간을 채운 사람의 마음, 정성, 다정함, 따뜻함, 분위기, 기쁨, 즐거움 같은 것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하고 확고하여, 사실 나는 다른 물질에 큰 관심이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나는 금목걸이를 자랑하는 부자보다는, 내가 원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의 신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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