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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의 테이블 Feb 26. 2024

'본질' 변하지 않는 그 무엇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서양철학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인물이 '탈레스'입니다. 탈레스는 '만물이 물'이라고 했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터무니없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사실 만물이 정말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아직 우리의 기술 수준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철학이 무엇이냐고 말한다면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에 와서는 '본질'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이성 중심'의 편파적인 철학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는 질문 자체가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시도인데, 이해하려는 시도는 대상을 내 손에 쥐어 파악하겠다는 의도를 포함하게 됩니다. 이러한 의도는 대상을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겠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에 이해되는 방식으로 세계가 존재되어야만 한다는 일종의 일방성을 전제합니다.


저는 현대철학자들의 이러한 지적에 동의합니다. 세계는 인간이 그 본질을 따지기에는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도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는지 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계를 만나는 방식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조차 없습니다. 철학적 인식론 면에서 우리는 사실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인류의 발명과 발견이 대단하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으며, 변화하는 모든 것 안에서 나 자신이라고 하는 동일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경이로운 일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어젯밤에 침대에서 잠든 나는 오늘 아침에 동일한 침대에서 깨어납니다. 당연히 어제 그 침대에서 잠든 나와 오늘 아침에 일어난 나는 같은 나입니다. 하지만, 왜 같은 존재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밤 사이에 우리의 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더 빠졌고, 세포는 변했으며, 조금 더 늙어 어제의 나와는 다른 나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루 밤이 아니라 20년이라고 이야기해 봅시다. 2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쩌면 동일한 부분이 아예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3년마다 한 번씩 완전히 바뀐다고 합니다. 얼굴의 생김새도 많이 달라졌고, 목소리도 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20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신'의 동일성 때문입니다. 몸은 달라졌지만, 몸 안에 있는 정신은 '기억'을 중심으로 동일성을 유지해 왔습니다. 극단적으로 만약 오늘의 내가 어제의 기억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오늘의 나에게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게 됩니다. 어제의 내가 나라고 할 만한 근거(기억)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더라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여전히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더 극단적인 가정을 해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 역시 기억을 상실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우리는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서로 전혀 연결되지 않습니다. 


기억이 없으면 존재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변하지 않는 기억이 있어야만 연속된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기억'이 아닐까요? 


역사는 공동체의 인격을 유지시키는 기억 

일본과 우리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갈등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세대들은 일본을 참 좋아합니다. 일본의 음식, 애니메이션을 가장 좋아하는데, 일본 애니메이션만 보고 일본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친구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위안분 강제 동원'이나 '강제 노동'등의 역사와 이에 대한 배상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어두운 면입니다. 일본의 젊은이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을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냐?" 

그들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왜 자기들이 사과를 하고,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지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상식적으로 과거의 과오를 후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역시 '기억으로 연결되는 동일성, 정체성'을 그 근거로 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100년 전의 그들과 100년 후의 그들이 개별적으로는 다른 인격체일지라도 그들은 '역사'라고 하는 국가의 기억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동일한 인격체입니다. 그 기억은 자신들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합쳐져 존재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본질의 중요성 

현대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본질'이라는 것이 마치 구시대의 유물 같아 보이지만,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존재성'조차 성립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시대와 공간을 따라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너무 극단적인 주장은 아닐까요?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너무나도 많고,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음이 혼란스럽습니다. 

죽은 남편을 위해 3년 상을 지내는 열녀가 되는 것은 너무하다 하더라도, 자기감정을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목표지점이 없는 표류와도 같은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등의 철학자들은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것이 세상을 알아가기 위한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변하지 않는 동일성, 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 그 본질 안에 존재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있을지도 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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