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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범 Dec 21. 2018

15 '나'란 정체성의 핵심, 기억. 첫 번째 이야기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는 거야.” - 내 머리속의 지우개 

기억이 사라지는데 행복이 무슨 소용이고 사랑은 또 뭐야. 다 잊어버릴 텐데. 나한테 잘해 줄 필요 없어. 난 다 까먹을 건데.


난 곧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될 거야. 자기가 내 옆에 있어도 왜 있는지도 모르게 된다고. 내 머릿속엔 자기가 없는 거야. 나도 없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기억이 사라지면, 영혼도 사라지는 거야.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한 장면이다. 병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여주인공은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다. 기억은 내 삶을 연결해주는 실타래와 같다. 이 실타래가 끊어지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꿈꾸는 인간적 삶이 아닌 순간만이 존재하는 ‘어제도 내일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 모두는 생물학적으로 거의 똑같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된다. 나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먼저 이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 가족, 내 친구들, 내 일, 내 꿈, 내 집,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과 후회했던 순간들이 생각난다. 이 모든 것들은 기억이란 실로 꿰매 져서 나의 정체성을 만든다.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를 정의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이다. 


물리적 측면에서도 기억은 중요하다. 피부나 장기 세포는 며칠마다, 적혈구는 4개월마다 바뀌고, 단백질 분자도 바뀐다. 인간의 모든 세포는 새로 대체된다. 물리적으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이렇게 매일 바뀌는 나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기억이다. 


기억은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과거 수렵채집 시대에는 저 나무에 달린 빨간 열매를 어제 맛있게 먹었는지 아니면 먹고 나서 배가 아팠는지를 기억해야 그 열매를 다시 먹거나 아니면 다른 먹을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저기 보이는 작은 날쌘 동물을 어떻게 잡았는지를 기억해둬야 다음에도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기억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었고 인간적 존엄성과 고귀한 삶을 위해서도 소중하다.


기억은 사회의 영속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문화의 전수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사회는 기억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회가 지속되어야 나 또한 지속되기에 기억의 의미는 단지 ‘예전 것을 기억하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억에 관한 뇌의 연구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있다. 그는 H.M.이라 불렸다. 당시 환자의 이름은 사생활 보호와 인권보호 차원에서 비공개되었지만, 그의 사후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으로 밝혀졌다. 신경심리학자인 브렌다 밀너는 H.M.을 50여 년 동안 연구하면서 기억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밝혀냈다.  


H.M.은 7살 때 자전거를 탄 사람과 부딪혀 넘어지면서 뇌진탕으로 인해 뇌전증 환자가 되었다. 그의 증상은 점점 심해졌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발작을 치료하기 위해, 결국 1953년 27세에 뇌전증 수술을 받았다. 수술로 뇌전증을 일으키는 양쪽 측두엽 안쪽을 제거했다. 이후 발작은 상당히 줄어들었지만, 다른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바로 몇 분 전의 일도 기억할 수 없었다. 기억의 저장고 역할을 하는 ‘해마’라는 부위가 수술로 절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수 분전에 외웠던 단어들을 기억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자기가 외웠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H.M.은 수술 이후 새롭게 만난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수십 년 동안 브렌다 밀너를 만났지만, 매번 방문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대했다. 하지만 그는 수 초에서 수 분 전까지는 기억할 수 있었고, 또한 어린 시절의 추억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지적 능력이나 성격은 그 전과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기억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수 초에서 수 분까지 유지되는 단기 기억과 아주 오래된 기억은 해마에 저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기억은 인지 능력과 별개의 다른 뇌 기능인 것도 밝혀졌다. 


브렌다 밀너는 몸으로 기억하는 기전도 해마와는 다른 부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서 별 모양을 따라 그리는 다소 복잡한 동작이 필요한 움직임을 매일 연습시켰고, 어제보다 오늘 더 능숙하게 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연구자는 그를 대상으로 감정과 관련된 기억을 연구했다. 악수할 때 미세한 전기가 흘러서 상대방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장치를 가지고 H.M.과 만날 때 장난을 쳤는데, 다음 날 H.M.은 그 연구자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그와 악수하려는 순간에 손을 뺐다. 이는 감정과 관련된 기억도 해마와는 다른 부위에 저장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또한 언어를 정상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 봐서 언어와 관련된 기억도 해마와는 다른 부위에 저장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55년 동안 120여 명의 연구자가 그를 연구해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기억 관련 연구에서 그의 이름이 거의 항상 등장했으니, 그는 진정한 뇌과학과 심리학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학자는 그가 있었기에 뇌과학이 심리학과 결별하고 지금의 위치에 설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순간만을 살 수 있었던,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을 그가 뇌과학과 심리학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가혹한 그의 운명에 대한 조그만 선물이었을까?


H.M.으로 알려진 헨리 몰레이슨의 생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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