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산다는 것에 대해
내 나이 20살 때, 첫 자취를 시작했다. 부모와 떨어진다는 슬픔보다는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한 설렘이 더 컸다.
낭만의 도시 춘천에서 보내는 나날은 참 자유롭고 행복했다.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많은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돼 보기도 했고, 학기마다 있는 시험에 정신없이 바빴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진한 연애도 했다(이건 현재진행중).
그때의 나에게 자취는 낭만이었다.
어느덧 자라, 꿈을 찾아 생계를 찾아 서울에서 두 번째 자취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 나에게 자취는 현실이다. 꿈을 찾아왔다기엔 너무 낭만적이고, 생계를 찾아왔다기엔 너무 각박하니까 그냥 '현실'이라고만 말하려 한다.
이제 어느덧 자취 9년차에 접어드는 날 보며, 어떤 이는 굉장히 독립적이라며 칭찬해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월세가 장난 아니겠다며 현실적인 걱정을 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부모님께서 참 딸이 그리우시겠어요"라는 말을 한 적은 없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아서 참 고맙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내가 애써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이 다 드러나게 될 테니까.
이건 얼마 전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날 춘천으로 보낸 후 몇 년동안 참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다 잠을 못 자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불면증이 왔다고 한다.
처음엔 내가 너무 걱정 돼 전화를 했지만, 통화를 하면 그날은 보고싶은 마음이 더 커져버려서 너무 힘드셨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서 견뎌내시려고 일부러 전화를 안 하는 연습을 하셨다고 한다.
참 슬펐다. 그때 당시 난 엄마에게서 연락이 안 오면 조금은 자유롭다고 느꼈다. 당연히 나도 엄마가 그리워 울기도 했지만, 가벼운 만남으로 잊고 연애로 잊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전화가 오지 않으면 '날 별로 걱정하지 않으시는구나. 잘 지내시는구나.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라며 안도했다. 그 상황을 즐기느라 부모님의 서툰 이별 과정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왜 더 엄마를 챙기지 못했는지 죄송스럽다. 엄마도 딸과의 이별은 처음이셨을텐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
'이제라도 더 잘해야지, 더 좋은 추억 많이 쌓아드려야지'하지만 서울 생활 바쁘다고 연락도 잘 못하고 겨우 하는 거라곤 한 달에 한 번 내려가 이틀 지내고 오는 게 다다.
고작 이틀 지내고 옴에도 참으로 좋아하신다. 바다도 갔다가 카페에서 수다도 떨다가... 그동안 못 했던 정말 일상적인 생활을 함께 보내고 온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가장 예쁜 풍경을 볼 때쯤, 엄마는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딸, 내려와서 살면 안 될까?"
"딸이 내려오면 엄마랑 이런 풍경 매일 볼텐데"
항상 같은 대답을 하는 걸 아시면서도 장난스럽게 물어보신다. 그럴 때마다 난 "아 여기와서 무슨 밥벌이 하고 살아~"라면서 애써 단호하게 툭 내뱉고 만다.
최근 폐경기를 맞으시고 조금은 달라진 우리 엄마. 예전엔 내가 더 슬퍼한다고 보고싶다는 말도 잘 못하셨는데, 예전처럼 속으로 삭히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하는 게 내심 좋기도 하지만 슬픈 건 어쩔 수 없다.
엄마. 난 지금 서울로 다시 올라가는 중이야. 매번 이 시간에는 마음이 좋지 않지만, 꽤 괜찮았거든- 근데 오늘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몇 십년 뒤에 나이가 들어서 엄마를 볼 수 없을 그 때가 오면 내가 지금 이때를 엄청 후회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매번 나한테 내려와 살면 안 되냐고 말 했던 엄마가 많이 생각날 것 같았어. 지금 내 결정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 너무 늦지 않게 다시 같이 살자 약속해. 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게 엄마도 잘 지내고 있어 곧 또 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