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문>을 읽으며 가장 당황했던 것은 생각보다 긴 소설이라는 점이었다. 전자책으로 읽었기 때문에 두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종이책으로 치면 500페이지가 넘는 작품이었다. 전자책은 질감이 아닌 파일 이미지로 고르기 때문에 간명한 제목과 일본 여성 작가에 가진 편견 때문에 짧고 가벼운 소설일 거라 생각했다. 실사은 정반대였다. 진중하고 집요하고 뚝심있는 소설이었다. 섬세한 묘사와 미려한 문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덕분에 가뜩이나 긴 소설이 더 길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여름의 문>은 1부와 2부, 두 챕터로 나뉜다.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이지만 사실 두 챕터는 크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1부에서는 남루한 현실과 그보다 더 초라했던 어린 시절을 묘사하고 2부에서는 소설가로 데뷔한 주인공 나쓰코가 비혼 시험관 아기 시술에 관심을 보이며 엄마가 되는 것을 고민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1부에서는 주인공의 남루했더 어린 시절, 그로 인해 맞이하게된 초라한 성년의 삶을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어릴적 부모님의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나쓰코는 지금도 가난을 떨치지 못하고 있고, 미혼모에 싸구려 술집에서 일하는 언니는 자신의 딸이 말하는 걸 거부하는 데도 가슴 수술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2부에서는 어느정도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된 나쓰코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염려와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반대를 하는 목소리는 불우했던 자기 자신의 과거이다.
비혼, 시험관 임신이라는 논쟁적인 소재를 다루는 이 소설은 가치판단을 최대한 보류하면서 독자들을 윤리의 재판정으로 끌어들인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성교를 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 보편적인 출산과는 달리, 데이터로만 확인할 수 있는 남성의 정자로 임신을 해서 혼자 아이를 낳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지 고민하게 된다. 아빠 없이 자라는 수없이 많은 편모 가정을 본다면 착상에 필요한 정자를 제공받을 때 반드시 사랑이 필요한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명 탄생이란게 필요와 선택의 결과물로 쪼그라들을 수 있다는 걱정도 든다. 인간이 자녀를 키운다는 건 버릴 때만 잠시 마음이 괴로운 화분을 집안에 들이는 거랑은 다르니까. 결국 독자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겠다. 생명은 선택하는 것인가 선택받는 것일가.
나쓰코가 시험관 임신을 고민할 때 제공받을 정자의 유전적 결함 가능성에 대해 설명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럴만한게, 정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유전병 확률이 적고 바라는 자녀상에 가까운 유전자를 택하는 게 현명하다는 뜻일 거니까. 여기서 질문은 다시 돌아간다. 최선의 유전적 발현이 아닌, 어딘가 부족하고 모자라고 흠결이 있더라도 각자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보편적 인간들의 모습을 어떻게 봐야하는 걸까. 시험관 임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최선의 결과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탄생에 실패란 없다. 그저 각자의 모습대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삶을 좇아 살아갈 뿐.
우리는 모두가 부족한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가치가 부여되는 건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가 사랑의 증거이자 결과물이기 때문은 아닐까. 따뜻하고 깨끗한 곳에서든, 누추하고 허름한 곳에서든 헐벗은 두 남녀가 뜨겁게 사랑을 하게 되어 작은 생명이 잉태되고, 숨이 붙고, 피가 돌게 되는것이다. 생명라는 것은부족한 두 종재가 사랑으로 빚어낸 최선이다.
소설에서 나쓰코는 어떠한 결정을 내리지만 작가는 그 결정이 옳다거나 그러다고 분명히 말하진 않는다. 그저 나쓰코가 결정한 선택이고 그녀가 그 결정에 진심을 다할 거란 단서만 던진다. 가치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아니, 어쩌면 판단 자체가 필요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배회할 때 마주하게 되는 심상이야말로 이 소설이 진정 그리고 싶어하는 문을 연 여름의 풍경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