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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o Aug 18. 2024

미래의 내가 해주는 위로

윤가은 감독 <우리들>을 보다가

어쩔 수 없는 아저씨의 일상을 살면서 지난날들과 작별하며 살고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는 몇몇의 생각이 있다. 울적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들이다. 그건 타임머신에 관한 건데, 타임머신이 실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형태일지 상상해 본 것이다. 타임머신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증명은 과학자들의 몫이고 내 몫은 내 인생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일뿐이다.


살면서 종종 마주치는 특이한 경험들, 그중에서도 맥락에 맞지 않는 친절을 겪거나 뜻밖의 따뜻한 말을 들을 때 종종 생각했다. 그런 경험들이 타임머신의 한 형태가 아닐까. 미래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면, 일종의 발동 조건으로, 타임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해 과거의 나를 만날 때 반드시 다른 사람의 형태를 해야 하며 미래의 자신이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SF 영화처럼 과거의 나를 만나는 순간 시공간이 망가지거나 그렇지 않다.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은 허락되는데, 만나더라도 반드시 알아챌 수 없어야 한다.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말을 걸어 메시지를 주려 하겠지만 직접적일 순 없으니 결국 은유와 상징, 혹은 비언어적 표현만 허락된다.


스물셋, 오사카에서 쓰러지기 직전의 내게 갑작스레 바나나와 주스를 건네주던 할머니가 그랬고, 스물여덟, 평양냉면 노포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 옆자리에서 낭만론에 대해 설파하던 할아버지가 그랬다. 어쩌면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도 그렇게 쓰였는지 모른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역시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위로하기 위해 만들었는지 모른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우선 과거(이면서 현재인) 내가 이렇게 알아챘으니 설정 실패다. 할머니에게 대뜸 멋진 말을 듣고는 ’허허 참 특이한 할머니일세.’라고 속으로 말하고는 뒤돌아서자마자 잊어버려야 타임머신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과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자. 설정의 오류 속에 머물다 보면 미래는 깜깜하고 아득한 곳이 아니게 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는 다정한 친구가 된다. 한 시절의 실수는 미래의 내가 위로해주면 되고, 미래의 나를 위해 과거의 내가 좀더 애써주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삶의 어느 순간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내가 다정한 손을 건네줄 거란 믿음이 든다. 나를 가장 잘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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